송학의 박정희 육영수 숨은 이야기 자네가 대통령 애인인가? 소문이란 원래 한입 두입 건너다 보면 이자가 붙고 새끼를 치는 법. "애기 들었수?" "그 장언니란 여자 말요?" "글쎄 장언니 땜에 대통령이 노발대발했대지, 뭐유." "K회장은 장언니 때문에 반신불수가 됐대지, 아마?" "온천장의 모든 경영권이 장언니에게 넘어갔대요." "맞아요, 지금 사장은 그냥 얼굴 마담이래요." "대통령 친필 임명장까지 갖고 있대며?" "장언니 생활비도 청와대에서 나온다잖아." "거, 대통령이 직접 봉투에 넣어 챙겨 준대누만, 허허허…" …한껏 부풀리고 마음껏 떠들어라. 그럴수록 장언니의 끗발이 비례된다는 것만 알자. K회장과 온천장 사장의 음해공작은 오히려 장언니에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어 줬다. 눈알 맞대는 군상마다 우러러 뵙죠, 찾아오는 손님이 오히려 장언니에게 굽실대죠. 바야흐로 장언니의 전성기가 도래한 어느 화창한 봄날, 이상한 물건(?) 하나가 장언니를 찾아 불원천리 달려왔다. 이상한 물건이라고 콜라병 들고 지구촌을 헤매는 부시맨 같은 물건이 아니고 찾아와 하는 짓거리가 이상했다는 얘긴데, 대뜸, "자네가 장언닌가? 뭐야, 이거, 아니잖아, 그래." 대체 뭐가 아니라는지 한번 들어 보자. "자네가 진짜 장언니 맞는감…?" "그런데 왜 그러시죠?" "나 이거 죽갔구만."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인간도 만나고 저런 인간도 만난다지만 이건 좀 별종이다. 느닷없이 찾아와 사람 불러 앉혀 놓고 이게 아니라니…? 그럼 어떤 걸 찾아 먼길을 달려왔다는 얘긴가 대체, 한참을 훑어보더니 새끼손가락을 꼬나 보이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자네가 그러이께 대통령 이거다 이거여, 시방?" 이게 어디서 무슨 소문을 어떻게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는진 모르되 노는 게 점점 점입가경이다. "어쨌거나 좋아, 우선 이거 받게." 이거, 또 돈 봉투다. 어째 걸핏하면 돈 봉투를 흔들어 장언니를 공포에 떨게 하는가들, 그래. "어때, 오늘밤 내 시중도 쪼깨 들어 주소잉?" 이 자슥 이거 인간 진짜 못쓰겠네. "나가 말씨, ○○ 화학 사장이여, 이름 들어 봤을 거루마이." 요약해서 대통령 세컨드라니 자기도 한번 돈으로 품어 보겠다 이 얘긴데, 장언니가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노발대발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된다. "이거봐요!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러나 이 인간은 아직 꿈을 못 깨고 몽중에 있었다. "됐어야, 내 팁은 듬뿍 줌쎄 자, 자!"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더 얹어 내미는 거 있지? 기어코 장언니의 소프라노가 온천장에 울려 퍼졌다. "이거 보세요, 사장님. 난 대통령 애인도 아니고 누구 시중 들고 하는 그런 여자가 아녜요!" 더구나 장언니로 말하면 돈 봉투에 노이로제 걸린 언니 아닌가. "그 봉투 갖고 썩 나가요, 대신…!" 대신…? 황당해진 인사가 장언니의 말꼬리에 바싹 귀를 조아렸다. "대신, 당신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 두겠어요."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 두겠다니…, 이 무슨 뼈있는 공갈 협박이신가 그래, 예상을 뒤엎는 장언니의 반응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 이거 봐요, 장여사…" 드디어 '장여사'를 부르짖는 걸로 봐 엔간히 다급했던 모양이다. "노, 노, 노, 농담일쎄…, 설마하니 각하께 고해 올리시려는 건 아니시겠지?" 이런 물건은 가급적 눈알 맞대고 빨리 상종 않는게 이기는 거다. "당장 나가랬잖아요." 장하고 통쾌한 우리의 장언니. 등짝에 왕소금이라도 확 뿌릴 걸 그랬어. 어쩜 그렇게 검은 돈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었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런데 이 물건…, 장언니에게 쫓겨난 인사, 쫓겨 나와 가만 생각하니 아무래도 뒤가 캥겼다. 막말로 각하에게 깍각 짖어라도 버리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법, 자고로 매사 유비무환에 최선의 방어는 선제공격이랬다. 이 친구가 통신로비를 시작한 건 그날 오후부터라고 기록되어지는데 그건 순전히 자기방어 본능에서 비롯되었음이라… "어, 최사장! 야 고거 맹랑하대? 응, 가서 만나봤지." "그래 어떻게 생겼대?" "콧대가 보통 아녀, 제 입으로 지가 대통령 애인이라며…응, 그래서 내가 좀 꾸중을 하고 왔지, 그럼, 내 성질에 그런 꼴을 그냥 보고 올 수 있나?" 이게 대전을 차고 올라 세종로를 후려친 후 구중침처 청와대 내전까지 메아리쳤다. 밤도 깊은 미드나이트, 프레지던트 집무실…, 대통령을 오늘밤을 하얗게 세우고 있었다. 무슨 놈의 하늘이 개울에 먼지가 일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질 않나, 그래, 가뭄에 목 태우는 농민들의 절규가 귓전을 떠나지 않는데, 통치자로서 이럴 때가 가장 바늘방석이다. 민중(民衆)은 우중(愚衆)이랬다. 우매한 민심은 하늘의 조화조차도 나라님 탓으로 돌리는 법, 애꿎은 담배꽁초만 한숨처럼 쌓이는데, 세종할배처럼 기우제라도 지내 볼까…? 대통령은 언제부턴가 '고통분담'의 취지에서 샤워는 커녕 세숫물도 아껴 썼고 선풍기도 끈 채 부채질로 한여름을 버티고 있었다. 밤을 지새는 낭군님이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영부인께서 집무실로 내려오셨다. "걱정하신다구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임자 아직 안잤어?" "이제 그만 올라가 주무세요. 하늘이 하는 일을 어쩌겠어요." 영부인께서 잠자리가 외로워 올라가자는 건 아닐 터, "내일 대전 내려가실 거죠?" "그쪽이 제일 피해가 심하다는 구만." 대통령은 또 죄 없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올라오는 보고만 듣고서는 감이 안 잡혀, 믿을 수가 없어. 얼마나 심각한지 직접 내려가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그랬는데 "대전 내려가시면 애인도 만나 보시겠네요?" 이건 또 무슨 난데없이 귀신 팥죽 떠먹는 소린가 그래, 황당해진 각하가 웃고만 있는 여사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애…인…이라니…?" 표정을 보아하니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장안에 소문이 짜아 하던데요, 뭘. 나만 여태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아니 임자,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모르세요? 그 장언니란 여자." 아하, 대전 온천장의 그 조바…! 대통령이 그제서야 감을 잡았는데 애인은 또 뭐고? 아무래도 여사님은 오늘 그 소문의 진상을 기필고 밝힐 태세다. "본인 스스로 대통령 애인이라구 큰소리 치고 다닌다던데요?" 급기야 대통령이 노성을 터트렸다. "대체 누가 그따위 소릴 하고 다녀?" 여사께서 일보후퇴,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며 나직이 얘기했다.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겠지만 그래도 혹 모르니 내려가시면 한번쯤 주의를 주세요." 어색해진 대통령이 능청을 부린다. 대통령 저녁상에 상다리가 휘어지는데 "그래서 임자 지금 질투하는 거야?" "제가요? 이 자리 빼앗길까 봐서요?" 나직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창틈을 타고 나와 메마른 청와대 밤공기를 적셨다. 그런데…, 웃고는 넘겼지만 대통령의 심기는 그렇게 편치가 않았다. '아니 그래, 대통령은 제 돈 내고 호텔 서빙도 못받나? 소문을 퍼트린 놈이 어느 놈인진 모르되 지놈도 호텔 들면 조바 서빙 받긴 마찬가지 아닌가, 괘씸한 친구들… 그냥 넘어가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그냥 뒀다간 나중에 무슨 상황으로까지 소문을 키울지 알 수 있나, 안할 말로 '대통령의 숨겨둔 자식…' 어쩌구까지로 비약되지 말란 보장이 없다. 잡기만 해봐라. 그렇게 단단히 벼르고 계셨는데. 대통령의 온천장 나들이는 거의가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대통령도 가끔씩 충전을 시켜줘야 하잖은가.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상의 업무를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 쉬고 싶은 욕심은 대통령이라고 일반 서민, 국민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제자리 눌러앉아 청와대에서 휴식을 취하겠나, 누구처럼 태국, 싱가포르를 휘돌아 곰 발바닥을 핥고 사냥할까, 게다가 자리를 비우고 멀리 나다닐 수도 없는 게 대통령이란 직업이다. 그래서 가깝고 항상 유, 무선 통신이 가능하며 언제라도 집무실로 롤백할 수 있는 대전 온천장이 선택되어진 건데, 대통령이 대전 온천장에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엔간히 급한 일 아니고선 주위에서도 찾지 않고 모른 척 대통령의 휴식을 도와주는 게 관례였다. 분위기 파악 못한 지방장관이나 관료가 있었다 치자. "지금 대전 온천장에 계시다는데 이럴 때 찾아뵙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을까요?" "이 친구 일 망치고 싶어? 휴식하러 내려가신 건데 올라오실 때까지 모른 척해요, 비서실에서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엔간한 보고도 안한대잖아." 그랬는데 이번 행차는 사정이 달랐다. 가뭄에 시달리는 한해 지역 시찰이다. 따라서 공개된 이동이라 누구건 꺼리만 있으면 각하를 만나 뵐 수 있다는 얘긴데, 이 기회를 눈알 흘러내리도록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방에 계셔 각하께 눈 도장 찍을 기회가 어려웠던 인사들, 그들에게 대통령의 공식행차는 천우신조의 기회요, 하늘이 주신 찬스다. 우선 각하에게 접근할 수 있는 꺼리부터 찾는 게 최우선이지만 그게 어려우면 각하께서 자기를 기억하도록만 해도 엄청난 수확이라… 오늘, 대전 지방 인사들께서 만사 제끼고 그 작업에 들어갔는데, 각하와의 독대가 어려울 땐 비상수단이 동원된다. "여보, 당신 각하께서 여기 내려오신 거 알고있지?" "그래서 얘긴데, 어제 저녁 얘기한 대로 당신 솜씨 한번 발휘해 보라구, 알았지?" 전화로 주고받는 부부간의 대화라 무슨 솜씨를 어떻게 발휘해서 뭘 하겠다는 건지 알 길이 막막하다만 그날, 시장 및 백화점 식료품 코너엔 화광(火光)이 인다. 때아닌 '사모님들' 쇼핑으로 서민들은 발 디딜 툼조차 없어진다. 왜 시장 백화점 식료품 코너에 귀하신 사모님들께서 개떼 같이 몰리는지 그 이유는 잠시 후 알게 되는데… 각하가 온천장에 내려오면 이제 장언니는 더 이상 말단 조바가 아니다. 위풍도 당당한 야전군 사령관이시다. 각하가 묵을 방부터 경호원 숙소 변기통까지 장언니의 지휘 아래 점검되면서 각하가 드실 음식의 간은 맞나, 대통령이 디디실 복도마다 계단마다 카펫은 바로 깔렸나, 좋아하시는 막걸리는 어디 걸로 준비가 되어 있나, 음식 만드는 주방 애들 신원은 확실한가… 호텔 애들 유니폼 상태는? 사장은 제자리 대기하고 있나… 이렇듯 온천장 모든 시스템이 장언니 체제로 풀 가동되는데, 바늘 구멍의 틈도 없어야 할 그 시스템에 뜻밖의 에러가 생겼다. 바빠 죽겠는데 호텔 현관에 지역 유지 사모님들이 엉머구리떼처럼 몰려와 장언니를 뵙게 해달라고 아비규환을 이루는 거 있지? 앞서 장바구니 들고 시장, 백화점 식료품 코너 휩쓸던 사모님들이신데, 지금 장언니 처지가 지역유지 사모님들 따위하고 노닥거릴 여유가 어디 있겠냐만 장언니가 또 마음이 얼마나 여리고 인정에 약한가… 거절할 줄 모르는 성격 아닌가 그 바쁘고 공사다망하신 와중에도 친히 나가 만나봤는데, 손에 손에 음식 보따리들을 한 바구니씩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칠첩반상기에 어포, 육포, 인삼부터 더덕산적에 상어알 졸임까지 없어 못 사는 것들은 죽었다 깨나도 눈요기 한번 못할 해괴망측한 산해진미들을 어디서 잘도 구해 장만들을 해왔다. 각하 밥상에 올려 달라는 지방 유지들의 간절한 진상품들인데, 전해 달라니 전해 주긴 하겠다만 이거, 각하께서 다 자실 수 있을랑가 몰라. 대통령께서 이거 다 자셨다간 올챙이 배 되어 작고하실 상황이라… 그렇다고 거절했다간 표정들을 보아하니 사생결단, 생사고락을 같이하자고 덤빌 태세들이라 까짓, 모른 척 각하 밥상에 하나 남김없이 죄다 올려 버렸는데 밥상을 휘둘러본 대통령의 표정이 묘했다. 눈이 화등잔만해지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거 있지? 한동안 그렇게 반 의식불명의 상태로 일관하시더니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시고 장언니를 쳐다보셨다. "이거 언제부터 식단이 바뀌었어?" 대통령의 표정이 좀 심상찮다. "아닙니다. 각하." "아니면? 이거 뭐야? 호텔음식이 원래 이게 아니잖아? 이거 다 뭐야?" 이쯤에서 사실을 고해 올리는 게 장언니로서의 임무고 음식보따리 싸들고 오셨던 사모님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주머니에서 명단과 목록이 적힌 메모지를 꺼내 각하에게 현황 브리핑을 했다. '저기 영광굴비는 어느 댁 남편께서 특별히 각하를 위해 일본에서 주문해 온 것이며, 앞에 있는 육포는 오늘을 위해 어느 댁 사모님이 여름부터 준비해 오신 거다. 그러니 군소리 마시고 잡수신 후 이사람들의 정성을 기억해 주시라…' 장언니 생각엔 각하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 자기를 위해 이처럼 지극 정성, 여름부터 장만하고 일본에서까지 주문해 온 충정을 봐서라도 인사 한마디쯤 하시는 게 도리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언니 생각이 맞았는지 어쨌는지 각하께선 한동안 감격에 겨우신 듯 오랜 침묵을 유지하시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거 봐." "네, 넷 각하." "나, 청와대에서도 이렇게 안 먹어, 아니 못 먹어, 이거 치워!" 아니, 무슨 폭탄주 자신 말씀인가? 일껏 장만해 온 걸 치우라니, 그럼 이걸 누가 먹으란 얘기야…? 의아해 하는 장언니를 보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 "사장실로 장언니 좀 오시래요." 각하의 섬세한 인정에 흠뻑 젖어 나오는 장언니에게 후배 조바가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분위기를 깨고 온천장 사장의 훈령을 이달했다. 건방진 친구 아냐? 이거···, 용건 있으면 지가 오지 발이 없나 눈이 없나, 왜 각하의 특명 받아 바쁜 장언니를 감히 오라 가라 해? "장언니! 부탁해 각하 한마디는 보증수표야"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두 눈에 가득 한 보따리 웃음을 담고 사장이 황송하게 맞이한다. "어이쿠, 어서 와요 장언니, 덥지···?" 느물거리는 액션으로 봐서 아무래도 무슨 목적이 있는 거 같다. "시원한 거 한잔 줘? 그래 뭘로 줄까?" 사내 녀석이 아부는 또···. 사장의 눈이 장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가슴에 꼭 안고 있던 각하의 하사품인 하얀 봉투에 내다 꽂히며 반짝했다. 각하께선 양로원, 고아원에 전달되는 음식이 모자라면 보태 쓰라고 준 돈 봉투···. 그걸 이 친구가 이상한 쪽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이야, 장언니···요즘 진짜 못 말려, 그거 각하께서 주신 거야?" 알고 덤비는데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냐 만 공식적으로 그걸 인정할 수 없는 장언니의 뼈아픈 고충이 있었다. 각하가 내신 걸 비밀로 하고 장언니 이름으로 해 달라셨던 성금 봉투가 아닌가, 이놈의 사장이 눈치가 벗으면 코치라도 있던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못 갖춘 온천장 사장은 쉴새없이 제 할말만 쏟아 낸다. "요즘 장언니 보면 정말 부러워 죽겠어." 대충 용건만 간단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시장, 군수는 아예 만나 주지도 않는다며? 허허, 설마 나한테도 그러진 않겠지? 얘가 본론은 어디다 꿍쳐 놓고 서론만 늘어놓으며 시간 낭비하고 있나? "내 평생 소원 한번만 들어줘야겠어, 장언니." 드디어 꿍쳐뒀던 본론을 끄집어내는가 본데, 장언니가 무슨 서낭당 칠성 귀신이냐? 네 소원 들어주고 말고 하게. "장언니, 아니 장여사···" 웃으며 하는 얘기라도 농담이 지나치면 상대방은 부담 갖는다. "각하께 슬쩍 한번만 얘기하면 돼, 내평생 장어니 은혜 안 잊을게." 헷갈린다 얘. 무슨 얘길 어떻게 하려고 서두부터 거창하게 깔고 나오니? "장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이번 총선에 출마하잖아." 얘가 온천장 말아먹고 나라 들어먹을 일 있나. 그곳이 어디라고 나서니? 나서길. 그러나 그건 장언니의 쓸데없는 걱정이고 온천장 사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쪽엔 진작에 얘기가 다되어 있는데 마지막 장언니 힘이 좀 필요해." 얘기 다돼 있다며? 공천은 떼 놓은 당상이라고 흰소리 치고 다닌 게 누군데? "각하 한마디만 있음. 보증수표야." 순간 장언니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이쪽엔 김용태씨가 있잖아요." 장언니가 정치 쪽에 관심을 갖고 있던걸 사장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 지역에 누가 나서야 한다는 것 정도는 시중 풍월로 이미 장언니도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온천장 사장은 그런 여론에 전혀 신경 끊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여기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중앙 무대를 떠나 한밭 벌 응봉산 기슭에 파묻혀 비정의 정치 세계를 한잔 술에 안주 삼고 있는 비운의 정치인이 있었다. 민간이면서도 유일하게 5·16주체에 끼여들었던 사람, 김용태…. YT란 이니셜이 더 통했던,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세와 도를 갖추고 있던 양반…. 그가 5·16과 인연을 맺게 된건 순전히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JP를 만났기 때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훗날 한반도 남단의 국정을 요리하며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두 사람은 잠시 스쳐 갔던 대학 동문의 선·후배로 인연이 맺어졌다. 당신 JP는 YT의 1년 선배…. 그러나 몰락한 충청도 양반 가문의 다섯째인 JP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제복을 입고 군으로, YT는 중학교 교사로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우리 JP, YT…. 이거 헷갈리지 않도록 신경 좀 쓰자, 자칫 혼돈 되어 어느 게 YT인지 누가 JP인지 모르고 막헤매다 자중에 역할 분담이 뒤바뀌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생기는데…. 대학에서 군으로, 여중 교사로 뿔뿔이 흩어졌던 두 사람의 인연은 6·25의 동족상잔으로 인해 다시 연결된다. 전쟁 터져 보따리 싸 들고 대구에 있는 JP를 찾아간 YT는 그곳에서 숙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당시 육군 정보국 소속 박정희 중령이었고 그 사람이 훗날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볼품없는 자그마한 덩치에 겨우 고급 장교 축에 낀 박중령은 전쟁의 와중에서 대구 삼덕동 어느 셋집에 신방을 꾸며 놓고 있었다. 신부야 물론 채시라도 아니고 강부자도 아님과 동시 '신디 크로퍼드'는 더욱 아닌 게. 얼마 전 대구 계산 성당에서 식을 올릴 때 주례 선생께서 분명히 말했다.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주례 선생님께서 신랑 신부 이름만 보고 잠시 헷갈렸다만 분명코 상대는 '육영수'란 신부였다. 그렇게 박중령 댁에서 눈칫밥 먹으며 더부살이이하게 된 YT는 남치마 노란 윷동 저고리의 새댁 시중도 받게 되고 고집불통 박정희와 유대 관계도 돈독히 하게 되는데, 그 만남의 훗날… 자신을 역사의 한가운데 꽃아 세울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었다. 예상 못한 건 또 있었다. 돌아서니 살얼음판 같이 냉정한 정치 바닥의 현실… 한때 3공의 '싱크탱크'로 권력의 중심부에 도서 봤었다.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들이 몰려왔었고 귓밥이 닳도록 정보 보고가 올라왔었다. 권력의 현실은 그 사람에게 올라가는 정보 보고의 양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을 움켜 주니 실세에겐 주체 할 수 없는 정보가 올라간다. 그러나 막상 권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정보가 차단되다. YT는 그 허망했던 세월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지금은 초야에 밀려 과거를 반추하는 서러운 신세가 된 것을 …돌이켜보면 너무 어처구니없이 밀려난 거 있지? 그건 순전히 일본 야쿠자 애들 때문이었다. 권력의 주변은 언제나 측근들의 기득권 방어로 더럽혀진다. 그런 의미에서 각하의 임기가 오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각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들도 끈 떨어진 갓 신세요, 어느 강물에 흘러 다니는 오리알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중앙 정보 부장 김형욱을 꼭지점으로 한 공화당 몇 몇 핵심 실세들이었다. "사장님실로 장언니 좀 오시래요." 각하의 섬세한 인정에 흠뻑 젖어 나오는 장언니에게 후배 조바가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분위기를 개고 온천장 사장의 훈령을 전달했다. 건방진 친구 아냐? 이거…, 용건 있음 지가 오지 발이 없나 눈이 없나, 왜 각하의 특명 받아 바쁜 장언니를 감히 오라가라 해?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눈에 가득 한보따리 웃음을 담고 사장이 황송하게 맞이한다. "어이쿠, 어서 와요 장언니, 덥지…?" 느물거리는 액션으로 봐서 아무래도 무슨 목적이 있는 거 같다. "시원한 거 한잔 줘? 그래 뭘로 줄까?" 사내녀석이 아부는 또… 사장의 눈이 장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가슴에 꼬옥 안고 있던 각하의 하사품인 하얀 봉투에 내다 꽂히며 반짝했다. 각하께서 양로원, 고아원에 전달되는 음식이 모자라면 보태 쓰라고 준 돈 봉투…. 그걸 이 친구가 이상한 쪽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이야, 장언니…요즘 진짜 못 말려, 그거 각하께서 주신 거야?" 알고 덤비는데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나만 공식적으로 그걸 인정할 수 없는 장언니의 뼈아픈 고충이 있었다. 각하가 내신 걸 비밀로 하고 장언니 이름으로 해달라셨던 성금봉투 아니가, 이놈의 사장이 눈치가 없으면 코치라도 있던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못 갖춘 온천장 사장은 쉴새없이 제 할 말만 쏟아낸다. "요즘 장언니 보면 정말 부러워 죽겠어." 대충 용건만 간단히 해줬음 좋겠는데… "시장, 군수는 아예 만나 주지도 않는다며? 헛헛, 설마 나한테도 그러진 않겠지?" 얘가 본론은 어디다 꿍쳐 놓고 서론만 늘어놓으며 시간 낭비하고 있나? "내 평생 소원 한번만 들어 줘야겠어, 장언니." 드디어 꿍쳐뒀던 본론을 끄집어 내는가 본데, 장언니가 무슨 성황당 칠성 귀신이냐? 네 소원 들어주고 말고 하게. "장언니, 아니 장여사…" 웃으며 하는 얘기라도 농담이 지나치면 상대방은 부담 갖는다. "각하께 슬쩍 한번만 얘기하면 돼, 내 평생 장언니 은혜 안 잊을께." 헷갈린다. 얘. 무슨 얘길 어떻게 하려고 서두부터 거창하게 깔고 나오니? "장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이번 총선에 출마하잖아." 얘가 온천장 말아먹고 나라 들어 먹을 일 있나, 그곳이 어디라고 나서니? 나서길. 그러나 그건 장언니의 쓸데없는 걱정이고 온천장 사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쪽엔 진작에 얘기다 다되어 있는데 마지막 장언니 힘이 좀 필요해." 얘기 다돼 있다며? 공천은 따놓은 당선이라고 흰소리 치고 다닌 게 누군데? "각하 한마디만 있음, 보증수표야." 순간, 장언니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이쪽엔 김용태 씨가 있잖아요." 장언니가 정치쪽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걸 사장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 지역에 누가 나서야 한다는 것 정도는 시중풍월로 이미 장언니도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온천장 사장은 그런 여론에 전혀 신경 끊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여기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중앙무대를 떠나 한밭 벌 응봉산 기슭에 파묻혀 비정의 정치 세계를 한잔 술에 안주 삼고 있는 비운의 정치인이 있었다. 민간인이면서 유일하게 5·16 주체에 끼어들었던 사람, 김용태…. YT란 이니셜이 더 통했던,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트릴 세와 도를 갖추고 있던 양반… 그가 5·16과 인연을 맺게 된건 순전히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JP를 만낫기 때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훗날, 한반도 남단의 국정을 요리하며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두 사람은 잠시 스쳐갔던 대학동문의 선·후배로 인연이 맺어졌다. 당신 JP는 YT의 1년 선배…. 그러나 몰락한 충청도 양반 가문의 다섯째인 JP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제복을 입고 군으로, YT는 중학교 교사로 뿔뿔이 흩이졌었는데, 우리 JP, YT…, 이거 헷갈리지 않도록 신경 좀 쓰자, 자칫 혼동되어 어느 게 YT인지 누가 JP인지 모르고 막 헤매다 나중에 역할 분담이 뒤바뀌느 경우가 왕왕 생긴다. 생기는데… 대학에서 군으로, 여중 교사로 뿔뿔이 흩어졌던 두 사람의 인연은 6·25의 동족상잔으로 인해 다시 연결된다. 전쟁 터져 보따리 싸들고 대구에 있는 JP를 찾아간 YT는 그곳에서 숙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당시 육군정보국 소속 방정희 중령이었고 그 사람이 훗날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볼품없는 자그마한 덩치에 겨우 고급장교 축에 낀 박중령은 전쟁의 와중에서 대구 삼덕동 어느 셋집에 신방을 꾸며 놓고 있었다. 신부야 물론, 채사라도 아니고 강부자도 아님과 동시 '신디 크로포드'는 더욱 아닌 게, 얼마 전 대구 계산성당에서 식을 올릴 때 주례선생께서 분명히 말했다.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주례 선생님께서 신랑 신부 이름만 보고 잠시 헷갈렸다만 분명코 상대는 '육영수'란 신부였다. 그렇게 박중령 댁에서 눈칫밥 먹으며 더부살이하게 된 YT는 남치마 노란 윷동 저고리의 새댁 시중도 받게 되고 고집불통 박정희와 유대 관계도 돈독히 하게 되는데, 그 만남의 훗날…. 자신을 역사의 한가운데 꽂아 세울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었다. 예상 못한 건 또 있었다. 돌아서니 살얼음판 같이 냉정한 정치 바닥의 현실… 한때 3공의 '싱크탱크'로 권력의 중심부에도 서 봤었다.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들이 몰려왔었고 귓밥이 닳도록 정보 보고가 올라왔었다. 권력의 현실은 그 사람에게 올라가는 정보 보고의 양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을 움켜 쥔 실세에겐 주체할 수 없는 정보가 올라간다. 그러나 막상 권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정보가 차단된다. YT는 그 허망했던 세월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지금은 초야에 밀려 과거를 반추하는 서러운 신세가 된 것을… 돌이켜보면 너무 어처구니없이 밀려난 거 있지? 그건 순전히 일본 야꾸자 애들 때문이었다. 권력의 주변은 언제나 측근들의 기득권 방어로 더럽혀진다. 그런 의미에서 각하의 임기가 오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각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들도 끈떨어진 갓 신세요, 어느 강물에 흘러 다니는 오리알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꼭지점으로 한 공화당 몇몇 핵심 실세들이었다. 장언니는 각하께 '과감히' YT를 추천하는데… "우리가 왜 혁명을 했습니까? 몇 놈 배불리고 살찌우자고 목숨 걸고 혁명한 게 아니잖습니까." 동요를 받은 듯 JP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YT의 핏발 선 눈이 막 시동 걸린 고다마의 술기를 싹 가시게 했다. "공화당을 창당해 민정 이양을 이룩한 것도 우리 아닙니까? 오늘의 안정과 성장의 발판을 닦은 게 그놈들입니까? 왜 어른 옆을 싸고 돌며 나라를 말아먹을 궁리만 하는 겁니까?" 그렇게 몇마디 울분을 터트리며 술로 화를 삭인 후 헤어졌는데 이게 고다마를 통해 김형욱 정보부장의 안테나에 걸렸고 그날 술자리의 대화가 각하에게 보고될 때는 'JP 대통령 추대 모임'으로 각색되어져 있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난데없이 대통령 추대라니? 게다가 남도 아닌 조카사위가… 각하께서 보실 제 심히 괘씸한 놈들 아닌가? 아직도 임기가 몇 년이나 남았고 업무 잘 보고 있는 사람 뒤통수를 치고 뭐? 차기 대통령…?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의 가장 민감한 아킬레스건은 '레임덕' 현상이다. 차기 후보가 설치면 권력의 중심부가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 아닌가. 각하께선 일도 양단… JP도 치고 YT도 쳐버리셨다. 그렇게 권력의 핵심부에서 어이없게 밀려나 그 억울한 사연을 가슴에 묻고 한을 삼키며 살아온 YT였다. 각하께서 지척에 와계시다지만 불러 주시질 않으니 달려가 뵈올 수도 없고…, 뵐 수만 있다면 하소연이라도 하겠건만…. 굳게 닫힌 대문 밖은 곧 있을 총선으로 뜨겁게들 달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열기의 중심부에 비록 끈떨어진 운동화 신세지만 민초들 입에선 언제나 YT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 비어 있는 YT의 자리를 온천장 사장께서 비집고 들어가겠다고 장언니에게 로비를 하고 있는 중인데. "그리구 말야, 내가 국회에 나가면 이 온천장은 장언니가 맡아 운영해 줘야겠어." 온천장을 장언니한테 맡겨? 혼자선 이미 뱃지 달고 의상당에 입성했네, 뭐. 그런데 장언니한테 부탁할 거 뭐 있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랬자 장언니밖에 더 있어? 안그래?" 집구석에 있는 사모님들었음 보따리 싸겠다. 쫓아내려 할 땐 언제고 이제 뭘 맡아 운영해 줘? 그날 저녁, 각하의 티타임 때… 화병의 꽃을 갈고 있는 장언니에게 느닷없는 각하의 카운셀링이 있었다. "어때? 자네 생각엔…. 누가 나오길 바래?"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다듬이 방망이질하는 소리신가? "여기 사람들 말야.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누가 나오길 바라는 거 같아?" 아, 그 얘기…. 온천장 사장이 장언니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대통령께선 지금 민심의 동향을 묻고 계시는 중이며 이때 장언니의 한마디는 곧바로 공천과도 직결될 수 있는 바로미터 아닌가? "말씀드리긴 송구하오나 사람들 얘기론 이곳 온천장 사장이 그래도…" "온천장? 여기 사장 말야?" "그렇습니다. 각하. 제가 모시고 있는 분이라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뭣 하지만 사람들 생각을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이곳 온천장 사장이 그중 가장…" 온천장 사장의 부탁대로라면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장언니의 양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자기를 믿고 하문하시는 대통령께 거짓 말씀을 올릴 수 없다는 게 장언니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망막을 가리고 너울대는 온천장 사장의 얼굴이 자꾸만 인정에 걸려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장언니에게 각하께서 대답을 재촉하셨다. "왜? 자네도 찍어줘 봐야 그놈이 그놈이다. 이거야?" 까짓 눈 질끈 감고 온천장 사장을 천거해 버려…? 드디어 장언니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시장이나 사람들 모임에 나가 보면 사람들 얘기론…" "그래, 사람들 얘기론…?" "이번 공천에서도 김용태씨는 밀려날 거라면서…" 기어코 장언니는 믿는 도끼로 발등을 찍어 버렸는데, 장언니를 돌아보는 각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래…? 김용태가 공천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생각이 없는 건가, 무식해 용감한 건가… "아까운 사람이 썩고 있다고들…" 각하의 표정이 무서울 만치 무표정하게 굳어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 말씀드린 게 분명하다고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무거운 침묵으로 파이프 담배만 죽이시던 각하께서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장언니를 돌아보셨다. "그런 얘기들을 누가 해? 아니, 용태 그 친구 지금 여기 어디 내려와 있어?"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하께선 옆방을 통하는 인터폰을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으며 뭔가 망설였다. 그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리시는 거 있지? "아니지… 흐음…" 시간이 정지되며 질식할 것만 같은 그 짧은 순간의 천근 같은 무게에 가쁜 숨을 삼키고 있던 장언니에게 각하의 특명이 떨어졌다. "안 되겠어. 이건 자네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어. 자네가 찾아봐. 찾아올 수 있겠지?" 각하께서 지금 누구를 찾아오라시는지 장언니에겐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이제까지의 내용으로 봐서 조금 전에 거명된 김용태란 사람을 말씀하심이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각하." 장언니도 이제 척하면 와닿는 게 있다. 이는 대통령과 윤락녀 우선 각하의 의관부터 정중히 찾아오신 후 가스나가 밤새 뭐라고 스피척했는지 그걸 상세히 파악해야 할 터… 사연이 그렇게 된 거였는데… 상황 끝을 알리는 보고가 현장에서 올라왔다. "뭐야? 그래 찾았어? 모자도 찾고 그 애도 찾았다고? 알았어. 일단 데려와!" 우선은 한숨을 돌리게 된 서장님과는 별개로 우리의 기구한 운명의 소녀는 영문도 모른채 산 채로 생포(?)되어 긴급 수송됐는데. 소녀가 끌려간 그 빈 자리엔 구구한 억측과 UB통신들만이 어지러이 난무하고 있었다. "간첩이 아니랬잖아." "글쎄, 저게 대통령하고 어젯밤에 있잖아…." "직접 했대?" "쉬잇, 그런 말하면 잡혀간대. " 경찰서로 끌려온 소녀는 헷갈렸다. 설사 그게… 아니, 그분이…? 대통령과 닮았다는 생각도 했었고 직접 물어보기도 했었지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담당 형사와의 심문 과정에서 그 엄청난 사실은 현실로 다가왔다. "자, 그러니 차근차근 생각해 봐. 각하와 주고받은 얘기들이 있을 거 아냐."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뭐야? 형사의 조바심치는 독촉이 꿈이 아니란 걸 일깨워 줬다. "한마디도 빠뜨리면 안돼, 잘 기억해 보라구. " 기억이나 마나 차츰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서 소녀의 세숫대야가 화이트로 탈색되기 시작했다. "세…세상에, 그분이 그럼…?" 다시 말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는 표현도 되고 좀더 유식해 터진 수사를 구사하지면 사색이 되었다는 유권해석도 가능한데, 각하의 친서와 금일봉까지 받은 처지에 꿀릴 거 뭐 있어 사색이 되느냐? 상대가 누군가… 하늘같이 지엄하신 나라님. 대통령 각하 아니신가? 그 어마어마한 분을 신발까지 벗어들게 하고 2층 곰팡내 나는 다락방 코너로 몰아붙인 게 누군가? 그뿐이면 또 다행이게? 알코올에 절여 갖은 욕설과 넋두리를 펴발라 놓은 짓거라가있잖은가. 사태의 짐각성을 깨달은 소녀가 울상이 되어 근무자에게 하소연했다. "아, 아저씨 …,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옛날 같아 봐라,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일 아닌가? "난 몰라요, 정말 몰라요…, 술에 떡이 되어 있었단 말이에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몰라요 어떡하죠? 네?" 그러나 담당 형산들 소녀의 운명을 점칠 수 있으리? 불현듯 지난 17년의 세월이 주마등 같이 뇌리를 스쳐갔고 원인 모를 오기 같은 게 치밀어 올랐다. 내가 뭐 … 못할 말했나? 까짓 죽으라면 죽지 뭐. 어차피 구겨질 대로 구겨진 인생. 아까울 거 없다. 기왕 죽을 바에야 떳떳하고 당당하게 죽자…고 굳게 다짐했는데,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오며 졸음이 오는 거 있지? 어처구니없는 현실로 인해 갑자기 초긴장 상태로 있다가 다음 단계인 체념 상태로 넘어가면서 찾아드는 일종의 신체적 변화다. 그렇게 기구한 운명의 소녀가 시장기와 졸음을 만끽하고 있는 시각…. 인왕산 굽이 아래 푸른 기와 높은 집…. 노팬티로 달려온 세 분 각료께선 지금 한창 감 잡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들 계셨다. 소녀의 시장기와 졸음에 대한 원인 제공자 대통령 각하…. 그 각하의 '어심'을 감 잡아야 미리 통박도 굴리고 만반의 대비를 하겠는데 줄기차게 창 밖만 노려보고 계시니 뒤꼭지만 갖고 감이 잡히나? 그러길 무려 12분여… 여기서 12란 숫자는 15대 대선 출마 후보 용가리들의 숫자를 뜻함이니 행여 착오 없기 바란다. 바라고… 급기야 각하께서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서서히 좌회전. 몸을 돌려 좌중을 지그시 노려보신 후 느닷없는 일성을 던지셨다. "임자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 뭐 하는 사람들이냐니? 각하도 싱거우시긴 원, 손수 임명장 수여하고 악수까지 하셔 놓고선, "임자!" 한 분 각료께 각하의 시선이 꼬나 박혔다. "네, 넷! r각하…!" "서울역앞 윤락가 알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봐, 알아, 몰라?" 지적 당한 각료께서 각하의 물음에 충실히 답하느라 묻지도 않은 과잉 답안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 그쪽보다는 종3쪽이 더 유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하!" 그런데 각하의 다음 하문이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임자 가봤어?" "워… 워낙 시간이 없어서 미쳐…" 엉겁결에 대답을 해놓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느닷없이 윤락가엘 가봤느냐는 각하의 물음도 이상했지만 답변한 쪽 역시 스스로 헷갈리는 게. 이제까진 미처 못 가봤으나 다음에 시간 내어 꼭 가보겠다는 얘기가 되어 버렸잖은가. 커뮤니케이션의 난이도가 바로 여기에 있음인데… 까짓, 가는 거야 뭐 어렵나? 가지 뭐, 허헛. 하룻밤 몸 풀라시는데 그걸 왜 마다해?. 싫어할 놈 누가 있고 말릴 년… 누가 있어? 막말로 대통령 령이신데 마누란들 어디 끽소리 해? 그런데 문제는 각하의 진의이다. 대체 이야기 골자가 뭔가? 그러니 사창가에 가라는 말씀인가. 가지 말란 분부 신가. 각하께서 각료들의 혼돈 되는 뇌파장을 읽으신 모양이다. "말귀들을 못 알아듣는군. 책상에 앉아 결재 도장만 찍는 게 장관들 할 일이야? 어디 누가 답변해 봐요." 좀더 보충 설명이 필요한데 매정한 각하께선 긴 설명이 없었다. "보릿고개 넘겼다구 배곯는 국민 없을 거란 착각들 말라구. " 비상 소집에 대한 상황 설명 대신 각하의 장황한 정신 훈화가 있었다. "개혁이다 창조다 목청만 높인다고 국민들이 죄다 따라올 거라면 임자들이 왜 필요해? "위정자의 눈길이 미치는 곳에서부터 변화가 따른다는 걸 왜 모르느냐." 그리고 드디어 각하와 우리만 알고 있는 결론이 나왔다. "진흙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체념해 버린 소녀가 있다면 임자들과 난 이미 죄인이야." 국가의 녹을 먹겠거든 어느 한구석 빠트림 없이 살펴보란 말씀 같기는 한데…. "가서 살펴봐요. 진정 그들이 원하는 게 무언가. 직접 그들 속에 파고들어 그 현장을 피부로 느껴 보란 말이야. " 그로부터 얼마뒤. 수도 현관 또 윤락가는 불도저로 밀리고 서울의 명물 종3까지 덩달아 철시되는데, 28년전 1969년의 일이며 각하와 술잔을 나뒀던 소녀의 소원대로 그곳의 윤락녀들은 직업보호소로 보내져 미용, 운전. 고무공장. 가발공장 아가씨들로 둔갑. 산업 역군의 보람을 갖고 새 생활을 누리게 된다. 서럽게 운 소녀 하나 그해 여름, 영부인이 죽어 가장 서러운 소녀 하나가 있었다. 그 소녀는 지방에 마련된 영부인의 분항소를 찾아 서럽게 울다가 품고 간 대검으로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바쳤다. 소녀의 이름까진 알 필요 없다. 그러나 영부인이 죽어 왜 서러운지는 알아야만 할 이름 모를 소녀. 그 사연을 알기 위해 우리는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1년 4월. 전방고지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는 늦 봄, 전 국토가 때아닌 대선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오르던 그해. 애초 일곱 명의 후보로 스타트한 선거전이 두 명이 하차, 다섯 명으로 압축된 후 다시 박정희, 김대중 두 후보로 정리되면서 골목마다 직장마다 눈 맞대면 대선, 대선, 영남 표다, 호남 갈이다, 저마다의 해박한 정치 논리로 지지 기반을 토로하는데… 막걸리가 넘쳐 나고 고무신이 동났던 얘긴 거론치 말자. 돈 봉투 날아다닌 것도 꺼내면 누워 침뱉기다.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지사임과 동시에 아직도 지우다만 낙서처럼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는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전국토가 대선 열기에 파묻혀 예측불허의 상황 아래 각 진영의 선거참모들 X, 오줌 못 가리던 어느 모닝 타임, 박정희 후보는 정작 태평연월을 구가하고 있었다. 비서실에서 올린 오늘의 스케줄 메모엔 두 곳의 지방 유세가 적혀 있었고, 책상 저편 트랜지스터에선 들뜬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뉴스를 토해내고 있었다.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오늘 낮 예비군제 폐지론을 주장, 막바지 대선전의 열떤 공방을 가열시켰습니다." 각하께서 나직이 독백을 했다. "저 친구 저거, 저러면 자살골 먹는데…?" KAL기 납북 사건이 있은 직후다. 게다가 미군 철수가 거론되고 있잖은가…. 각하의 독백을 깨뜨리고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지략과 관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권당 중진이었는데,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각하." 허리 숙인 폼을 봐 어쩐지 얘기가 길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각하의 뇌리를 스처갔다. "이제부터 무조건 기뻐하십시오. 각하." 얘기를 엮어나가면서 재미를 주자고 대사 표현을 약간 윤색했다. 그러나 논픽션에 충실했음을 독자제위께서는 감안하시기 바란다. "제가 엄청난 정보를 하나 입수했습니다. 핫핫핫…" 그, 무조건 기뻐해야 할 엄청난 정보란게 뭔고…하니,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자. "어떻게 하면 이번 대선 치르는 각하의 심려를 덜어드릴까 해서…" 불철주야, 노심초사 온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차, 급기야 오늘 새벽 두 시, 섬광처럼 대뇌를 강타하고 소뇌를 후려치며 필히 오더란다. 그건 실로 하늘의 계시요, 진실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영적인 텔레파시였단다. 해서 밤길을 마다 않고 달려간 곳이 신당동에 위치한 어느 유명한 역술인의 집이었단다. "각하의 생일을 적어 올렸습니다." 각하가 의아하게 물었다. "내 생일을? ○의원이 내 생일을 알아요?" 각하의 말씀엔 장난끼가 묻어 있었다. 별 이상한 각하다 보겠다, 그지? 딴에는 새벽잠 설치고 달려갔다 왔다는데 칭찬은 못 해줄 망정 왜 장난끼를 발동시키는가 말이다. 그러나 각하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 각하의 생일은 정확히 음력으로 9월 30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9월 30일 생일이 11월 14일로 둔갑되어 있었다. 매년 II월 14일이 되면 화환, 축전이 무더기로 날아 들고 선물 꾸러미, 생일 케이크가 청와대를 어지럽히는데, 도대체 자신도 모르는 생일이 어디있나, 그래? 그사연이 궁금해진 각하께서 은밀히 알아보신즉 웃지 못할 해석과 풀이가 담겨 있었다. 언젠가 각하께서 그 사유를 영부인에게 설명드렸는데 "임자, 이 친구들말야, 내 주민등록상에 기재된 양력 생년월일을 보고 음력 생년 월일로 착각들 하고 있구먼, 허허허…" 영부인께서 행여나 히는 노파심에서 어드바이스를 하셨다. "그냥 모르는 체 하세요. 그리 값비싼 선물도 아닌데요, 뭐." 지금, 앞에서 텔레파시가 어떻고 하는 친구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각하의 하문에 장난끼가 믄어 있었음인데 그걸 모르는 상대는 거침이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은 항상 각하의 생일을 유념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지금도 정치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가만 보아하니 각하께서 상당한 관심 표명을 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스피치에 탄력이 붙었다. "각하께서 탄생하신 11월 14일로 말씀드리자면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길일로서…" 민족의 영광이요, 국가엔 행운의 괘가 나오더란다. 그래서 이번 대선도 압승할 수밖에 없다는 유권해석까지 덧붙였는데, 세상 어느 점바치가 양력생일로 운세 판단을 하는가…? 쫌 심했다. 각하의 안만 근육이 굳어지는 걸 그 친구는 미처 보지 못했다. 의기양양 집무실을 물러가면서 각하의 나직한 탄식은 더 더욱 듣지 못했다. '어떻게 저런 친구가 입법부 수장까지…' 웃고 넘기려 했지만 아부가 좀 지나쳤던가 보다. 각하의 불편한 심기가 즉각 인터폰을 타고 비서실로 전달됐다, "실장, 메모해요." "네 각하, 말씀하십시오." "방금 나간 그 친구, 다음 공천에서 배제시키오" "알겠습니다. 각하. " 그래도 뒷맛이 개운찮은 각하의 머리맡에서 영부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공천까지 탈락시키심 어떡하세요? 여간해서 집무실엔 들르지 않는 여사였다. '자기 딴엔 기쁘게 해드릴려구 한 일인데 정치 생명까지 끝내게 하세요?". 임자가 여긴 웬일이야?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목적이 있어 보였다. "오늘 지방 유세에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이 또한 예전엔 없던 주문이다. 그러나 각하께선 어쩐지 오늘은 혼자 다녀오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렇다고 지방에 남몰래 숨겨둔 벽 속의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긴장된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기 싫은 게 결전을 앞둔 장수의 자존심이다. 막상막하의 세 겨루기를 하고 있는 박정희 후보로서는 오늘의 지방 유세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음이라. "임자까지 갈 필요가 있겠어? 방송 나올 테니까 서울서 들어 봐요. 다녀오리다." 각하는 매정스럽게 등을 보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나 우리의 영부인께선 각하의 허락과는 무관하게 따로 계획이 있는 몸이셨다. 그 계획이 무언가는 곧 알게 된다. 청와대의 여러 비서실은 업무 분야가 각각 구분 지어져 있다. 비서실이라고 부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하는 게 아니다. 그중 영부인 담당은 제 2부속실인데 그 편제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각하가 훌쩍 따나신 후 제 2부속실에 영부인의 긴급 호출이 있었다. '여간해선 직접 내려오시는 양반이 오늘은 웬일이신가…?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간 실장께서 막 문을 여는 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에 놀란 나머지 눈알이 튀는 아픔을 맛보았다고 전해지지만 기록이 없어 확인치 못하는 작가의 안타까운 심정은 금할 길이 없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차양 넓은 '선캡', 해 가리개 모자에 굵은 테 안경까지 잡숫고 계시는 거 있지? 셜록 홈즈의 탐정놀이를 하려는 건 아니실 테고… "어딜 가시려고 그렇게 변장을 하고 계십니까?" "어때요, 이러면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겠죠?" "하지만 여사님…" "됐어요, 대통령껜 비밀로 해주시고 차량 준비 좀 해줘요." "행선지라도 말씀해 주셔야…"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경호도 필요 없어요. 굳이 보내겠다면 한 사람이면 충분해요." 여기는 양반 동네 로얄시티… 대전, 선거 유세장이 마련된 대전 공설 운동장. 각하께선 지금 수십만 명의 손님(?)들을 받아놓고 계셨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나와 주신 대전 시민 여러분…" 봄날의 아지랑이를 밟으며 운동장이 미어 터져라 꾸역꾸역 많이도 모였다. 각하는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이 당선되어야 할 당위성을 그들에게 조목조목 열거하고 계셨다. 솔직히 얘기해서 각하의 연설은 좀 재미가 없다. 소싯적 훈장을 한 탓인가… 교과서적인 얘기로 아동들을 앉혀 놓고 설교하는 식이다. 그래서 가끔은 JP의 구수한 연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우리 민족의 우수한 잠재력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목이 마른 듯 각하는 단상에 준비된 물 컵을 입에 가져갔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는 지금, 우리는 다시 백억불 수출고지를 향해 모두 함께 매진하고 있습니다." 각하의 유세가 한창 탄력 붙어 메아리치고 있는 유세장 저편 동남방 45도 지점. 빽빽이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찬 관중석 한쪽에 비록 기력은 쇠퇴했어도 시력만은 1.5인 할매 한 분이 계셨고 그 할매의 시선이 자꾸만 우회전, 우회전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네 하나가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있는데 그게 누군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거 있지? '저 여편네를 어디서 보긴 봤는데 대체 어디서 만났더라…? 붓돌이네 안사돈은 목이 저렇게 안 길어, 암만. ' 할매는 몹시 심각해지셨다. 늙기도 서러운 노친네가 필사의 기력으로 기억을 더듬어 오르는데… 아 갑자기 할매의 두 눈이 환희와 감격에 휘둥 거려졌다. 드디어 기억해 낸 것이다. 노인네가 실로 대단도 하시지, 가히 집념의 할매셨다. "육 여사님이시다! 영부인이 저기 있다…!" 주책없는 할매의 꼬장으로 영부인의 일행은 관중석을 들쑤시며 뽀록나고 말았다. 놀라움과 환희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연설 중단 사태가 빚어졌고 황급히 달려온 경호원들의 안내로 단상에 모셔졌는데, 이 민초들이 또 웃기는 게, 식순에도 없고 스케줄에도 없던 기립박수를 운동장이 떠나갈 듯 영부인께 날리는 거 있지? 다시 이어진 각하의 연설은 이미 김빠진 맥주거품 꼴이 됐다만 뭐 어떤가. 그날의 분위기로 봐서 각하의 연설 따윈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부인이 연출한 즉석 해프닝은 이미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을 극적인 감동과 힘께 압도적인 표밭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그날 각하의 스케줄이 W로 잡혀 있었음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을 줄 믿는다. 다음 유세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옆에 앉은 여사에게 각하가 불만을 표출했다. "임자, 나 서울 가면 임자 고발할 거야." "아니, 왜요?" "선거운동 방해했잖아,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뭐야?" "마음이 조급해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죠" "이거 타켓을 바꿔야겠어.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아냐," "무슨 말씀이세요?" "임자 설마 청와대 뛰쳐나가 신당 만드는 건 아니겠지?" 앞자리 앉은 수행원 입가에 잠깐 동안 미소가 머물렀다. "임자가 나보다 더 인기가 있더란 말야, 강력한 라이벌을 지척에 두고 몰랐어." 각하가 진짜 질투를 느꼈는지는 그 누구도 증언할 수가 없다. 청문회를 열 일도, 누굴 증인 채택한다고 입을 열 일도 아닌에, 각하의 강력한 라이벌께선 다음 유세장에서 또 한 번 각하의 연설을 김빠진 맥주거품 만든다. 송학의 박정희 육영수의 숨은 이야기 "잘 오셨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길을 알아보겠어요." 바로 그 말씀 듣자고 독대를 간절히 원했던 거다. 즉각 영부인의 권한으로 수송 헬기가 동원되고 사내의 딸애는 당시의 '수도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됐는데, 그 광경을 처음부터 죽 지켜보던 눈들이 몇 개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아니다. 대통령이 온다기에 유세장을 찾았던 보리문등 이들의 어느새 촉촉이 물기 젖어 있던 눈들을 말함인데 …. "천심을 타고 나신기라…" "하모. 저런 일이 어데 할라꼬 덤벼서 되는 일 이가?" "박달네 니 우나?" "용직이 엄마도… 울기는 누가 운다고 그라노 " 이 보리문둥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뭐라 쑥덕대고 코끝을 시큰거린 후 유세장으로 뛰어들어 그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줄줄 나팔 불어 버렸고 이게 또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넓디넓은 유세장 수성천변을 소리 없이 뒤덮은 후 대전에 이어 또한번 각하의 연설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각하는 그날 참으로 일진이 안 좋았다. 무려 두 번씩이나 청중들로부터 무시당하시다니 원…. 우여곡절 끝에 후보 연설이 끝난 후 대전에서의 기립 박수가 또 한 번 대구의 수성천변을 메우며 리바이벌 되고 있었는데…. 사연을 알 길 없는 각하는 착각 속의 자유를 만끽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임자 어때?" "뭐가요?" "아까 봤잖아 기립 손뼉 치는 거. 그만하면 나도 임자만큼은 인기가 있지?" 각하시여, 알고도 모른 척하오리이까? 모른 척 능청을 떠시오리까? 그 박수갈채는 진실된 휴머니즘에 대한 인간사 원초적 본능일지니 행여 진실을 아시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진 마실지어다. 그게 어디 연설 몇 마디로 얻을 수 있는 민심이오니까? 공경과 사랑은 그처럼 진실된 행동에서 얻어지는 법. 선거철 되면 불우시설 찾아가 봉투 몇 개 던져 준 후 계산된 몸짓으로 사진 박고 대문짝 만하게 신문 내는 그딴 짓거리하곤 차원이 다르오이다. 드디어 투표일을 며칠 앞둔 4월 20일. 궁정동 안가… 당시 날고기고 목에 철근 콘크리트로 도배한 실세 몇 분이 머리 맞대고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언론에선 사람 불안하게 연일 김대중과 박정희. 두 후보의 박빙을 점치며 예측 불허의 투표 결과를 가상 보도하고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자칫 정권이 바뀔 수도 있다는 긴박한 위기 상황에 방안은 후텁지근한 열기로 깊어 가는 밤도 잊고 있었는데 비서실장께서 방문을 열고 한 자락 시원한 밤공기를 몰고 나타났다. "허헛, 수고들 많습니다." "아니, 김실장님께서 이 늦은 시간에 웬일입니까?" 실장은 손에 들고 온 휜 봉투를 내밀었다. "지금 늦은 시간 따지고 있을 처집니까. 각하께서 모두에게 나눠드리랍니다. " 각하의 하사품인가 본데 봉투라면 수고한다고 격려금을 내리신 건가,,,? 성깔 급한 실세 한 분이 냉큼 봉투 속을 꺼내 봤더니 안에서 나온 건 달랑, 봉황 문장이 선명한 각하 전용 메모지 한 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실장님? 실장은 뭔가 알고 있는 듯 묘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각하의 약속어음이라고 생각들 하세요." 약속어음,,,? 각하께서 언제 이런 것도 발행하셨나?, 실장의 설명이 그 의문을 해소 시켰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 될지 각자의 의견을 그 종이에 써넣으시랍니다. 이길 건가 질 건가. 이긴다면 몇 표 차이로 이기겠는가…" 제일 근사치로 써넣은 사람에겐 개표 후 보너스가 있을 거란다. 각하도 참. 이 와중에 여유를 부리시다니… 장난이 심하신 거 같다만 뭐 어쩔 건가. 급기야 저마다의 뇌세포 혈관이 숨가쁘게 작동하게 시작했다. 하사금이야 얼마나 되건 상관 있나.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또 당장 쓸 만큼씩은 집구석에 있다. 문제는 얼마만큼의 근사치로 각하의 신뢰를 얻느냐 이건데, 개표 결과가 나온 후 각하의 특별 하사금은 '쓰루'란 애칭을 달고 다니던 K경제 각료에게 돌아갔다. K장관이 써 올린 봉투엔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 후보보다 약 90만표 우세'로 쓰여 있었고 실제 개표 결과도 박후보가 김후보보다 94만8천여표 우세로 나타났다. 예측 불허의 빅빙을 점치던 상황에서 1백만표 가까운 차이의 우승을 적중시킨 거다. 어쩌면 그 승리는 두 차례나 각하의 연설을 잘라먹으며 민초들 틈에서 좌충우돌했던 여사의 표갈이가 작용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게, 당시 대전과 대구에서 물표가 쏟아져 나온 게 그걸 증명하고 있음이라. 얘기가 낙동강 오리알로 정처 없이 흘러갈 뻔했다. 우리의 프리마돈나 '삼손이 아줌마'를 잊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나 갖다 바친 이름 모를 소녀의 후신…. 그전에 우리 모두 한 가지 반성 할 게 있다. 영부인의 배려로 헬기에 실려 수도 국군통합병원에서 수송된 소녀, 어린 게 수술실에 들어갔다는데 우린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병문안이야 못 가 볼 망정 이렇게들 인정머리가 없을 수는 도저히 없는 일 아닌가. 소녀가 실려갔던 수도 국군통합병원. 이 병원의 최고 대빵인 병원장 김OO공군 준장… 그는 오늘 예정에 없던 VIP손님 한 분을 받았다. "미리 전갈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번거로울 것 아네요?" 소녀를 헬기에 태워 수송시킨 영부인이 병원을 찾으셨는데… 한발 늦으셨다. "완치가 되었기에 수속을 밟아 퇴원시켜 내려보냈습니다." "그랬었나요...?" 여사의 입가에 멋쩍은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 "바쁜 일에 쫓기다보니 그만 깜박 잊었었어요-" 여사의 등위에서 간호장교 하나가 시들어 버린 장미 한 송이를 조심스레 전했다. "꼭 영부인께 전해 달라며 그 소녀가 남기고 간 꽃입니다." 그 꽃은 은혜를 아는 가난한 소녀의 정성이었다. 영부인과 소녀의 휴먼 스토리는 그 꽃 한 송이로 1막을 마감했는데, 그로부터 삼 년여 뒤. 장미를 남긴 소녀 국립 중앙 극장에서 총탄에 여사가 쓰러지고 지방에 빈소가 마련됐을 때, 빈소로 달려와 새끼손가락을 절단한 소녀가 누군가는 이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이번엔 시든 장미가 아닌 자신의 일부를 잘라 고이 받친 것이다. 이것이 '삼손이 아줌마'의 잉태 과정인데, 이제야 어렴풋이 감을 잡고 맥을 찾는 '버드헤드'독자님들… 아직 사손이, 삼손이 아님을 명심하라. 하나를 더 잘라야 삼손이고 손가락 두 개를 덥석덥석 자를 땐 그만한 사유와 명제가 있었을 터… 그 사유와 대의 명분이 무엇인지 인수분해를 해보자. . 청와대 경호실 H과장…. 그는 일주일 내내 기분이 우울했다. 일주일 전의 일이 좀처럼 떠나지 않고 가슴 한쪽에 차고 앉아 머리를 짓누르며 무게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는 당직을 마치고 가을 아침을 호흡하고 있었다. 희뿌연 안개가 무지개처럼 북악을 감싸고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리며 청와대의 전형적인 아침 정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또 하루가 시작되고, 국정의 산실인 이곳 청와대에선 또 어떤 역사를 잉태시킬 건가…' 부마사태가 진정됐으면 좋겠는데…' 바로 그때였다. 저만치 경호관 숙소를 향해 난데없는 꿩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사정없이 숙소 벽에 머리를 부딪고 피를 흘리며 바들거리다 죽어 가는 거 있지? 순간, H경호관의 세포 조직이 좁쌀처럼 돋아 올랐다. 경호원들은 육감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한다. 예고된 테러란 있을 수 없는 법. 꿈자리만 사나워도 동물적인 본능으로 근육이 굳어진다. 그리고 며칠간은 그 악몽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긴장된 생활을 이끌고 지친 일과를 유지해 나아간다. 그런 이유로 그는 동료 경호원들에게 불길한 광경을 보여주기 싫었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그 자리를 수습했다. 그리고도 좀처럼 떠나지 않는 불길한 예감에 특별히 경계 태세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오늘, 10월26일… H과장은 다시 당직을 맞아 내일이면 또한번 기억하기도 싫은 청와대의 아침을 속절없이 맞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그에게 초소 근무자로부터 요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청와대 본관 지붕 위에 희한한 물체가 앉아 있다는 보고였다. 순간… 68년의 무장 공비 침투 사건과 일주일 전 꿩의 주검이 섬광처럼 오버랩 되어 뇌리를 스쳐 갔다. 황급히 달려간 그의 눈에, 저만치 지붕 위쪽으로 어린애 만한 물체가 꾸르륵꾸르륵 거리며 시커멓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두운 밤이라 형체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어이, 저거 뭐야? 독수리 같기도 하고…" 옆에 서서 역시 눈알을 디룩거리며 의아한 듯 쳐다보고 있는 경호원에게 물었다. "독수린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도 눈썹에 털 나고 처음 보는 동물이란다. 어쨌건 위험 물질은 아닌 것 같아 발길을 돌리는 그의 귓전에 '탕! 탕'하는 두 발의 종소리가 밤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그것은 궁정동 만찬장에서 울려 퍼진, 한 시대를 마감하는 역사의 거대한 조종 소리였다. 그보다 앞서, 역사의 조종 소리는 대만의 어느 역술인으로부터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일찍이 맨주먹으로 인도네시아에 건너가 거대한 원목 사업을 일구어 낸 한국이 낳은 거인이 있었다. '코데코'의 최 모 회장님, 그는 74년 8월 어느 날 대만으로부터 쪽지 한 장을 받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유명한 '장쾌' 역술인이 다급하게 보낸 '전언 통신문'이었다. 한자로 휘갈긴 내용을 풀이하면 대충 이랬다. (양력 8월15일 10시 전후로 '궁중 지변'의 징후가 있어 영부인의 신변이 지극히 위험하다고 판단됨. 따라서 그 시간대의 외부 행사는 꼭 피하도록 권유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참고로 얘기하면 그 역술인의 이름은 강발산이란 사람이고, 대마 가서 이 사람 모르면 외계에서 갓 내려온 ET거나 영국에서 이제 금방 복제된 인간으로 봐도'무방하다. 그만치 네임밸류가 낄린 역술가란 얘기고,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최회장께선 주저할 일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판단, 황급히 한국으로 날아와 평소 친분이 있던 당시 박종규 경호 실장을 찾았다. "믿어야만 합니다. 속된 말로 밑져 봐야 본전 아닙니까? 그러니 그 시간만 영부인께서 행사를 피하시도록 조치하세요. " 그런데 경호 실장이 그걸 깜박 잊어버렸는지 어쨌는지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낱 점쟁이의 어설픈 넋두리로 치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또 그런 게, 예언이란 일이 터져야 사실이 증명되는 법. 괜히 얼굴도 모르는 점쟁이 말만 듣고 법석을 떨었다가 그게 증명이 안 되면 그 무슨 개망신인가. 명색이 대한민국의 막강 경호 실장이…. 그런데 불행히도 그 역술인의 예언이 국립 중앙 극장 8 15광복절 경축 식장에서 현실로 증명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1979년 10월 24일. '박통' 각하가 궁정동에서 아웃되시기 이틀 전. 최회장은 일본의 어느 호텔에서 역시 대만의 그 역술인으로부터 또 한 통의 반갑지 않은 '전언 통신문'을 받아 들었다. 이 양반이 비둘기 날리는 데 탄력 붙였나…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엄청났다. "박정희 대통령 하야(朴正熙 大統領 下野)!" 맙소사! 각하보고 물러앉으란 얘기 아냐? 이 양반이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작정했나. 청와대에 전하라는 얘긴 것 같은데 전할 게 따로 있지 그래, 이걸 무슨 똥배짱으로 전하라는 얘긴가? 그러나 문득 지난 74'년의 육여사 건이 기억의 파편을 합성시켰고 무언지 모를 심각성이 행동과 달리 심신을 조여 왔다. 국가에 변란이 일어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분명한데, 이걸 무슨 수로 각하 턱밑에 들이미느냐 이거다. 그렇게 뭉그적거리는 사이 시간이 흘러 10윌27일 아침, 회사 서울 지사장으로부터 날아든 상황 보고에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큰일 났습니다. 새벽 4시를 긴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 계엄이 떨어졌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중정부장 김재규가 궁정동 만찬장에서 각하를 시해 ... !" 이미 앞의 상황 보고만으로도 정황이 전달됐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쇼크 먹은 최회장의 귀에 더 이상 뒷얘기가 들었을 리 없었다. 대만의 '강' 도사가 저승사자처럼 각인 되고만 있었다. 그렇게 예고된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 땅을 할퀴고 간 그날, 1979년 10월26일 저녁. 궁정동 만찬장,,, 박각하의 친구 '유다'께선 태초 이런 말씀을 뱉었단다. "똑똑한 놈 몇 놈 골라? 또 이런 말도 했다던가,,, "형님, 난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 그리고 이어 ,,,, 앞서 거론했던 청와대 경호실 당직 H과장이 몇 발의 총소리로 '한다면 해'버리고 말았는데 유다의 코멘트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 야수의 심정으로 쏘았건, 더듬수의 야망으로 갈졌건 대통령을 함부로 시해하면 쓰나? 그러다 국정에 갭이 생기면 죽고 나자빠지는 건 국민들인데 ,,, ? 각설하고,,, 그해 10월. 각하의 빈소가 차려진 그 소녀의 고향 도시,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젠 '영계'의 모습을 낮춘 소녀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빈소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한 번의 손가락 절단을 감행, '삼손이 아줌마'의 별칭을 얻게 되는데, 그녀는 지금 두 자식의 어머니로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물론 그녀의 안방엔 신주처럼 모셔진 박통과 육여사의 영정이 언제나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었음이라 ,,, 심심풀이로 손가락 툭툭 자른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그렇다고 손가락 자르는 데 탄력 붙였다고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 그건 소녀의 이슬 같은 영혼에 대한 모독이요, 능멸이다. 어느 덧 중년의 몸이 되어 그때의 꽃잎 같은 추억을 전설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삼손이 아줌마, 그는 우리에게 은혜를 아는 인간의 자세를 행동으로 실천해 보여줬는데 ,,, . 고인 생전 ,,,여기서 고인이라 함은 '박정희'란 보릿고개 때의 청와대 주인을 말함이고 그 양반 이 청와대에 눈 시퍼렇게 뜨고 앉아 호령할 때 그 유명한 '삼선 개헌'으로 집권당 안에서조차 "하자! 말자-"로 당론이 분분, 갑론을박하던 어느 날 청와대 어전 회의석, 어느 집권당 중진께서 입에 '퐁퐁'을 잔뜩 물고 발치를 하셨다. "된다, 안 된다 따질 거 뭐 있어요? 우리 당 총재이신 박대통령 각하는 5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서, 각하께 좀더 일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 이 양반이 누군가는 알 필요도 없거니와 알아서도 안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지금도 국가 지도자로서 정계 원로로 행세하며 가끔씩 TV화면에 등장,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미래의 비전도 제시하고 계시는데 괜스레 찬물 끼얹을 필요 없잖은가. 착각의 자유는 역사도, 청와대 대통령도 말릴 수 없는 현실이고, 한 가지만 더 첨가하면 이분, 박통 앞에서 5천년 역사 어쩌구 했던 양반, 이 양반은 과거 이승만 각하 앞에서도 "5천년 역사상 한 번 나올까 말까,,, " 어쩌구를 리바이벌 해서 경무대로부터 엄청난 점수를 획득, 소싯적부터 이미 장래가 촉망(?)되던 인사이셨는데 자유당 정권의 침몰에도 오뚝이처럼 살아남아 혁명 정권의 실세로 거뜬히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전광 석화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그의 팔랑개비 같은 두뇌 회전 덕이라고 문민 시대인 현 정계에서도 칭송(1)이 자자하다. 매기 꺼낸 김에 이 양반의 출세 지향적인 에피소드 몇 개만 더 나열하자. 5 16이 터지고 혁명정부가 3권을 장악했던 그해 여름,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이놈, 저분… 구시대 정객들이 무더기로 끌려가며 오줌 똥 못 가리던 1961년 혁명 정국, 어느 바람 불어 빨래 널기 좋은 늦가을, 내일 당장 어떻게 될 운명인지 전혀 예측 불허이긴 이 양반이라고 달리 대책이 없던 어느 날, 그렇게 가슴 졸이며 뚫고 나아갈 구멍을 찾아 필사의 몸부림을 치던 어느 날, 조상의 보살핌이 계셨던가,,,. 천우신조의 가느다란 맥줄이 발견됐다. 사돈 팔촌의 사촌 당숙 아재비쯤 되는 먼 일가붙이가 국가 최고 회의 의장님신 박정희 장군 사모님과 터놓고 지낸다는 소스가 들어온 거 있지? 조상님의 돌보심인가, 아님 하느님이 보우하심인가. 성경인지 논어, 맹자인지는 모르되 '두드리면 열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아 불문곡직, 생전 눈알 한번 맞댄 적 없는 그 사돈 팔촌의 사촌 당숙 아재비뻘 되는 분께 내장이 휘날리도록 달려가 인사 여쭙고 연자방아처럼 대가리 조아리며 필사의 로비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여사님을 만나 뵈었고, 여사님의 배려로 목적했던 최고 회의 의장님과 독대를 이룩했는데, 그는 그날,,,. 각하를 완전하게 구워삶아 부팅을 해 버렸다. "의장 각하! 작금의 허리 잘린 국토 현실에서 기성의 되어 먹지 못한 정치인들로는 분단 조국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각하 같은 군 출신 영도자가 집권하셔야 국가와 민족의 안녕히 보장됩니다" 당시 미국의 반대에 부딪쳐 혁명의 대의 명분을 절박하게 찾아 헤매던 박의장이었다. '정치꾼'들의 생리를 미처 파악치 못하고 있던 정치 초년병 박의장에게 이 양반의 세치 혀놀림은 엄청난 무게를 싣고 힘을 실어 줬던가,,, . 즉각 의장 각하 정치 고분으로 발탁된 후 민정 이양 첫 내각의 각료로 뽑힌 다음 곧이어 대통령 선거 주무장관으로 맹활약을 펼치는데. 이 양반,,, 생전, 그토록 칭송했던 각하가 돌아가신 후 빈소에 엎드려 손가락은커녕 발톱 하나 잘랐단 보도도 없었다. 삼가 이 양반단 삼손 아줌마의 충절을 바친다. 기분 나쁘면 안 받아도 좋다. 부디 남은 여생. 부귀영화만 누리시다 운명하시길 바란다. 송학의 박정희 숨은이야기 육영수 선글라스와 목련꽃 중앙고의 특별손님 청와대 들어가는 효자동 길목에 동네 이발소가 있었다. 이 이발소 사장님, '박중복' 씨, 약관 스물일곱에 이발사, 면도사, 머리 감기는 총각까지 자그마치 월급 주는 종업원을 넷이나 거느린 젊은 사장님이셨는데, 그는 오늘 아침, 무척 바르고 흥분해 있었다 손님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가위질하느라 바쁜게 아니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왈랑거리는 거 있지? 맞선 보는 날이냐구? 음악이 흐르고 분위기 잡는 제과점, 식당, 커피숍 두고 이발소서 맞선 보는 놈 봤니? 새로 청와대 주인으로 뽑히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 길을 지나 청와대로 입성하신 단다. 해서 종업원들에게 손톱, 발톱 청결히 하고 하얀 가운 말끔히 입혀 도열시켰다. 당시 그 길은 일반인의 통행을 통제하던 길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이 지금처럼 청와대 안에 있는 게 아니었고 지금은 헐려버린 국립박물관… 전 중앙청에 있을 때라 아침저녁으로 대통령이 출퇴근하던 시절이 있다. 대통령 출퇴근 시간이 되면 사이렌이 울리고 길가 건물은 일제히 창문 커튼을 쳐야만 했던 그 시절, 따라서 지나는 길목이랬자 사람 구경하기가 가뭄에 콩나듯 듬성듬성한 길목에 휜 가운의 이상한 것들이 주루루 늘어서 있어 봐라. 단박 눈에 뜨일 거 아닌가. "각하, 여기에 이발소가 있습니다. 머리 깎을 일 있음 불러 주십시오? 바로 그거였다. 그 일념 하나로 생업도 포기하고 이렇게 늘어서서 최선의 액션을 취하며 대기하고 있는 중인데 경호 차에 둘러싸인 각하께서 보셨는지 어쨌는지 그들 앞을 지나 미끄러지듯 저만치 청와대 정문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셨다. 그리고 얼마 후…시커멓고 커다란 덩치들이 까까머리 애 하나를 호위하고 들어와 머리를 깎아 달랬다. 뭐고 이거…? 뭐 할 일 없이 덩치들이 둘씩이나 애 하나에 매달려 다니나 그래? 근데 녀석. 눈빛이 제법 초롱초롱 하구나, 야. 그렇게 바리캉 질을 전후 좌우로 돌려줬는데 다음에도 애는 같은데 다른 덩치들이 줄레줄레 따라오는 거 있지? 그 큰 덩치들이 애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공손스럽기까지 했다. 도대체 궁금해 미치겠던 박사장이 슬쩍 한 덩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부근에 사시는 모양이신 데 … " 덩치가 싱긋 웃었다. "청와대에서 나왔어요" 청와…대 …라면 … ? 맙소사… ! 그럼 저 꼬마… 아니 저 아이분께서 …대통령 아드님이란 말아냐? 갑자기 바리캉 잡은 손이 옆길로 빠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통령 아들을 단골 삼은 몇 달 후, 이번엔 여러 명의 덩치들이 불문곡직 좁은 이발소로 들이닥쳐 좌우로 정렬을 한 후 이발소 문을 열고 대기하자 곧이어 검정색 지프 한 대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발소 정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자그맣고 가두잡잡한 사내 하나… . 와이구-하느님? 가 … 가 … 각하 아니신가 …? 말로만 듣던 대통령 각하… ! 신문 방송으로만 대하던 박정희 대통령 …! 그날, 우리의 박사장은 생애 최대의 서빙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서빙을 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에 남아 있질 않았다. "사는 게 어떤가? 불가는 비싸지 않은가? 등등을 물어 오신 것도 같은 데…. 좌우당간, 그렇게 영식 지만으로 인해 맺어진 각하와의 인연은 급기야 청와대 이발 실장(?)직으로까지 연결됐고. 그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대통령 얼굴에 칼질을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득권을 누리게 되는데 -, . 호주의 12월은 겨울이 아니다. 바다 모래 사장엔 피서객들이 흔드는 도자기 (?)들로 시야가 어지럽다. 호주의 최고 권력자인 흘트 총리라고 계절을 역행하고 살 수는 없었던가 보다. 이 양반께서 체통없이 물 속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다 익사를 당했고, 그로 인해 호주에서 국상이 치러졌는데, 한 나라에 국상이 치러지면 친하게 지내는 나라에서 참석하는 게 예의다. 뭐, 거리가 멀다, 시간이 없다. 같은 게 통하지 않는다. 당시 수교국 숫자로 국력을 계산하던 우리 나라에선 필히 참석해서 호주와 우의를 돈독히 해야만 했고 각하께서 친히 참석키로 국론이 일치됐는데, 바로 이런 경우, '대통령 비행기 탈 때 밑에서 손만 흔들지' 않고 같이 '타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외무장관,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이VIP들을 수행하는 수행 요원들 … . 그 수행원 중 안경 끼고 입술 두툼한 분이 계셨다. 이름 같은 건 알 필요없이 그냥 'B'라고만 알면 되는 수행원인데, 이 이름 같은 거 알 필요없는… 그래서 그냥 B란 수행원에게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인물이 한 사람 있었다.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부터 각하 곁에 바싹 붙어 밀착수행을 하는 검정 싱글의 사내 하나… 처음 보는 친구였다. 경호실 친구들이라면 거의가 얼굴을 익히고 있다. 더구나 각하를 밀착 수행할 정도라면 더더욱 짜기가 알고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저 친군 듣고 보도 못한 생면부지의 명함 -가…. 대통령 옆에 바싹 붙어 다니는 걸로 봐서 꽤 높은 직책인 모양인데 경호실장이 바뀌었나…? 그래도 그런 게, 경호실장쯤이 바꿔면 신분에도 막 나고 하는게 원칙이고. 최소한 대충은 알려진 인물이어야 그간의 상식인데 저건 생판 안면부지. 금시초문의 인물이 아닌가. 게다가 박종규 경호실장은 아까 보니 통로를 오가며 경호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B수행원이 헷갈리는 건 단순히 그 사내가 각하를 밀착수행 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검정 싱글의 사내가 소중히 껴안고 있는 O07가방이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다가가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일. 그는 속으로 짐작을 했다. '아하,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각하의 블랙박스로구나…' B씨는 그날, 하루 온종일 신경쓰이고 궁금한 여행을 했는데 B씨를 헷갈리게 한 그 검정 싱글의 사내는 바로 우리도 알고 있는 효자동 이발소의 젊은 사장, 지금은 대통령 전용 이발사로 각하를 수행중인 박중복씨 였고, 'B'께서 그토록 궁금해 하던 문제의 007가방엔 대통령의 이발 도구가 소중히 챙겨져 있었다. 육여사는 언젠가 서방님…. 박통 각하 몰래 지방 나들이를 나갔었다. 가끔 신분을 숨기고 민심을 살피고 돌아온 후 저녁 식탁에서 각하에게 전달도 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게 여사님의 취미이자 부업었다. 그래도 그날도 몰래 청와대를 빠져나가셨는데, 영부인의 비밀 잠행을 무참히 박살내 버린 지방 도백이 계셨다. 어떻게 알았는지 도 경계선에 사이카와 패트럴카가 대기하고 있다가 앞뒤 좌우로 경호를 해대는 거 있지? 불편해지신 영부인의 심기는 아랑곳 없이 신나게 에스코트를 해댔는데, 그날…. 영부인의 행차를 그 도백에게 귀띔했던 비서실 관계자는 눈물이 나오도록 영부인에게 혼뜨검을 당한 후 시말서까지 써야 하는 생애 최악의 날을 맞게 된다. "내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니면 국민들이 날 친근하게 대하겠어요?" 원론적인 말씀이신 데 유구무언 일 수밖에…. "그렇게 경호를 하고 싶거든 사람들 눈에 안띄게 하세요" 이런 성격이니 지만군 경호에 브레이크 걸밖에, 난처해진 경호실에서 대책을 찾았는데 마침 구변 좋은 경호관이 한 분 계셨고 그 경호관께서 여사님의 설득 사절로 선출되어 앞으로 나섰다.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그럴 수도있습니다" 선출된 경호관은 역시 논리가 정연했다. "하지만 영부인님, 국가원수 직계가족의 안위는 곧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것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영부인께서 의아하게 경호관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얘기죠?" 경호관은 지금 이 순간이 여사님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란 걸 감 잡고 있었다. "지금도 사방에서 불순분자들의 준동이 날뛰고 있는 우리네 현실 아닙니까" 이래서 안보 논리는 좋은 거다. 봐라, 여사님도 꼼짝 못하잖아 …. 경호관의 안보 논리는 계속된다. "만에 하나 그들 불순분자들이 영식을 납치, 또는 위해를 가한다면 그건 곧 국가 중대사로 연결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까지 들먹이며 여사님께 겁을 준 후 결정타를 날렸다. "1 21사태를 잊으셨습니까?"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그걸 잊어? "각하의 목숨까지 위해하려 덤벼들던 자들입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고 원투에 스리고가 넘치며 자칫 피박까지 뒤집어쓸 판이라…. 그래서 마지못해 지만의 등하교길 경호를 승낙은 했다만 여사님껜 아침저녁 등하교마다 앞뒤로 따라붙는 경호원들이 신경 쓰이는 건 매한가지였는데, 그 경호원들에게 문제가 터졌다. 갓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축축해서 한잔 걸치기 좋은 날, 점심시간 직후 5교시 때였다. 수업에 들어간 담임선생께서 교실을 훑어보시니 한 군데가 비어 있는 거 있지? 언제고 그 자리에 그어야만 되는 VIP생도, 지만군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땡땡이를 쳤나…? 수위실에 경호원들이 한시도 빠짐없이 눈알 시퍼렇게 지키고 있는데 설마하니 담치기 해서 만화방에 늘어져 있진 않을 테고, 짝꿍도 행방을 모른단다. 점차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교무실에 비상이 걸렸는데…. 소식을 접한 경호원들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아니 그래, 잃어버릴 게 따로 있지 대통령 아들을 분실 당하다니 ….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얘긴가? 즉각 비상수색 작전에 돌입했는데, 비상 걸리긴 학교측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실종된 장소가 어딘가? 등하교때 길거리 오가다 실종됐다면 학교엔 책임이 없다. 그건 전적으로 경호원들 책임으로 돌려진다. 그런데 분실된 장소가 학교 구역 아닌가? 급기야 수업 들어간 선생님들 빼고 모두 동원령이 떨어졌는데, 천지신명이 굽어살피사 분실됐된 대통령 아들을 찾았다. 학교 구관과 본관 사이 중간 지점에서 혼자 울고 있는 거 있지? 자 이거, 실종된 건 해결됐는데 울고 있는 사연이 다음 문제로 대두됐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혼자 외롭게 울고 있는지 그 사연을 알아야 대책을 세우겠는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니 속수무책이라, 담임선생께서 대표 자격으로 조용한 곳에 데려가 카운슬링을 했는데, 사유를 알고 나니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사연인즉 …, 갓 입학한 학교라 학교 구조가 궁금했단다. 3년 동안 다녀야 할 곳인데 어디에 뭐가 붙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모교에 대한 예의 아닌가. 그래서 점심시간을 활용,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녔는데 일진이 나빠 하늘같은 왕고참 3학년 선배들의 음악 연습실인가를 기웃거리게 됐다. 화음을 맞추고 막 탄력 붙여 매치가 되려는데 느닷없이 새까만 햇병아리의 침입으로 리듬이 깨져 버린 선배님들이 뚜껑이 열렸다. 왕선배 ' A가 흠칫하고 나가려는 지만을 불러 세워 이성에 앞선 감정의 훈계가 실시됐다. "인마, 용무가 있음 노크를 하고 들어와 복창할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네 맘대로 들락날락 거리는 거야?" 옆에 있던 왕배 B도 끼어들었다. "이 자식 이거 명찰도 안 달았잖아" 그 뒤에 있던 과격 선배 C가 불문곡직 지만의 뺨을 후려갈겼다. "잉크 자국도 마르지 않은 새끼가 !" 뉘라서 감히 청와대 맏상주에게 손찌검을 했겠나…? 난생 처음 얻어터져 본 지만으로선 황당할밖에… 명찰은 입학한 지 얼마 안돼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학교 구조 좀 알려고 문 좀 열어본 게 대체 왜 뺨맞을 짓인가, 그래. 집에 가면 대통령 집무실도 들락날락 거리는데 …. 그러나 법이나 논리보다 주목이 앞섰고 상대는 왕고참님 들이셨다. 맞대 놓고 악다구니를 할 수 있나, 따지길 하겠나. 그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하소연할 데 없어 혼자 울고 있었던 건데, 학교측 입장으로선 상황이 점점 꼬여 가는 거 있지? 대통령 외아들이 학교에서 폭행을 당했다면 이게 어디 보통 문젠가? 그 뺨이 어떤 뺨인데 망할 녀석들이 손을 대? 대길 …. 바야흐로 처음 실종됐을 때하곤 전혀 차원이 다른 상황이 전개됐는데, 경호원들이라고 이 상황에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있나. 급기야 비상국무…. 교무회의가 소집됐다. 그리고 국론이 난분분했다. "어차피 지만군이 청와대 들어가면 얘기할 거 아닙니까?" "지만이보다 경호원들이 먼저 보고할 텐데요?" "차라리 그 전에 먼저 경위서를 올리고 학교측의 사과를 올리는 게 낫잖을까요?" 말하자면 자수하고 광명 찾자는 궁리들이신데, 대책회의는 그끝이 보이지 않았다. "때린 학생부터 처벌한 후 보고하는 게 낫겠어요" "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는데 설마 청와대서 어떻게 따겠어?" 여선생님도 끼어들었다. "맞은 학생이 누굽니까? 그리고 원칙적으로 폭력은 위반 아녜요?" 여선생하고 친한 경상도 남자선생도 거들며 나섰다. "맞심더, 그라고 소문을 들어보이끼네 영부인님이 특히 폭력이라카마 질색이라 안캅니껴?" 고시 준비중인 노총각 선생도 아는 체를 했다. "그래요. 형사소송법에 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이란 조항이 있죠? 그게 영부인 건의로 만들어졌다잖습니까" "그라마 이거 큰일이당가, 워쨌으면 좋더라고이" 중구난방, 갑론을박을 지켜보던 담임선생이 총대를 메고 비장한 각오를 선포하셨다. "모든 일은 담임인 제가 맡겠습니다" 맡는다면 무슨 대책이 있다는 얘긴데 그게 궁금한 선생님 몇분의 보충 질의가 있었다. "아니 담임선생이 어떻게요?" "뭐 좋은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담임선생이라고 달리 묘책이 서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어차피 벌어진 일 처분만 기다릴밖에요" 그리고 담임선생의 떨리는 손이 청와대로 전화 다이얼을 돌렸는데, 대통령 내외분은 지금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시느라 부재중이시란다. 긴장했던 선생님들께서 김이 빠졌다. 매를 맞건, 꾸중을 듣건 각오했을 때 해치워 버렸음 좋겠는데 …이거, 내일까지 피를 말리며 어떻게 기다리나? 그런데 있잖니…. 피를 말리며 기다리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던 게, 소식을 접산 기관, 교육원, 청와대 비서실 등에서 엉머구리떼처럼 학교로 학교로 몰려 오는 거 있지 …? 몰려와선 적어가고 조사하고 경위를 파악하고 법석을 떠는데 그래, 대통령 올 때까지 기다리며 피를 말리고 자시고 할 짬이나 있겠어? 좌불안석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학교 말고도 또 있었다. 용감무쌍하게 대통령 외아들 뺨에 손자국 낸 왕고참 학생들의 집구석 학부모님들 …. 아니 그래, 어디 손찌검할 데가 없어 하필 대통령 아들인가, 그래. 자식 사랑은 혈통도 없고 국경도 없댔다. 제 자식 맞고 왔는데 대통령이라고 기분 안나쁘고, 영부인이라고 감정 안생길까? 제발 덕분 조상님네들께서 굽어 살피시와 이 난국을 헤쳐 나가게 해주소서 …. 그렇게 전전긍긍, 뒤보고 밑 안닦은 심정으로 처분만 기다리는데, 거 …이상한 게, 가시방석에 앉아 기다리는 학교와 폭력학생 학부모들의 피를 말리려고 진짜 작정을 했는지 며칠이 지나도 청와대에선 감감무소식인 거 있지? 이런 경우,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얘기는 이치에 맞질 않는다. 청와대 일이니 필경 무슨 수순을 밟는 모양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애꿎은 담배만 장작개비 불지피듯 구워대며 미궁 속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드디어 청와대 비서실에서 학교로 전화벨이 울렸다. "영부인께서 방금 학교를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개교 이래 처음 맞는 초 VIP님 …. 게다가 저질러 놓은 일도 있다. 책상을 정돈하는 선생님들이나 집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폭력 학생 학부모님들이나 마음들이 천근인데,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엄숙한 자세로 일제히 교문을 주시, 이제 곧 들이닥칠 영부인 행차에 긴장들을 하고 있었다만…. 영부인께선 허를 찌르고 후문 쪽에서 나타나셨다. 따라온 수행원들은 후문 앞에 대기시켜 둔 채 마침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학생 하나의 안내를 받아 교무실까지 무사히 당도하셨는데, 허를 찔린 선생들께서 우르르 몰려나가 영접한 후 교장실로 정중히 모셨다. 자…, 무슨 말부터 시작하나.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 나가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던 교장 선생님 대신 영부인께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식을 맡겨두고도 진작에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어째, 말씀에 가시가 박힌 것같다. 순간…, 교장 선생님의 뇌리를 후려치고 스쳐가는 느낌이 있었다. 자고로 용서란 비는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 …. 그 만고 진리의 수순에 따라 선수를 치셨다. "일전, 예기치 못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 전 교직원이 죄스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살짝 영부인의 표정을 훔쳐보면서 다시 그 뒷말을 이어갔다. "모쪼록 아이들 일이라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 " 교장 선생님의 정중한 멘트가 미처 마무리되기도 전 영부인께서 말 중간을 자르셨다. "우리 지만이 뺨맞은 얘기군요. 그 일이라면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아니 …. 신경 끊으라니? 그 일땜에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됐나, 방귀를 갈겨도 속이 편했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영부인께선 뜻밖의 소식도 전했다. "그렇잖아도 여기 올 때 대통령께서 당부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만이 뺨맞은 일 때문에 학교 선생님들께서 걱정들 하고 있을 거요.' 한때 문경 보통학교에서 교편 잡은 경력이 있는 대통령이시다. 그래서 선생님들 오장육부를 훤히 꿰뚫고 계셨단 얘긴데, 이런 말씀도 하셨단다. '비서실에서 학교에 찾아가고 해서 소란들을 피운 모양이야. 임자가 가서 안심시켜드리고 와요. 내가 한번 초청하고 싶다는 뜻도 전하구…' 그리고 그 파출소 소장은 직위 해제… 실로 대단하고 막강하고 못 말리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셨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공경심으로 뿌듯한 감회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자고로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헌병대 영창에 끌려가 죽도록 당하고 직위 해제된 파출소 소장에게 군 복무중인 아들이 있었고 소식을 접한 소장 아들이 근무 부대장에게 면담 신청을 했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죽음의 고지에 야간불침번을 설때도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임했습니다. 그건 후방에서 불철주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시는 아버님께 작은 힘이나마 동참한다는 뿌듯한 사명감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권력의 발길 아래 만신창이가 되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과연 누구를 위해 충성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후 사정 얘기를 들은 부대장이 마침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청와대 비서실 직원이 보고서를 작성, 영부인께 고해 올렸다. 그리고 군 복무중인 아들의 얘기가 그대로 글로 옮겨져 각하에게 전달됐는데, 비서실장을 호출한 각하께서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되겠군. 이봐, 실장. 이 친구 지금 어디 부대장이야?" "수도권 00부대 사단장입니다, 각하" "파출소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는 아들 말야. 군 복부중인 파출소 소장 아들하고 한 동갑이라며?"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조사해 봐" "네? 각하…, 윌 말씀이신지…?" "군대 갈 나이가 넘었잖아. 술집 가서 싸울 힘은 있고 군에 갈 힘은 없었대?" "알겠습니다, 각하" 불행하게도 장군님의 아들은 병역 특혜를 받은 몸이었다. 각하는 병역 기피자를 가장 싫어한다. 자유당 시절의 어수선한 사회에서 병역 기피나 특혜 면제자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는데, 혁명 직후 이 친구들은 각하 땜에 죄다 서리를 맞았다. 혁명 정부는 사회 범죄자들과 함께 병역 미필자들을 잡아들여 '국토건설단'이란 곳에 유치, 도로 닦고 제방 쌓으며 죄값을 대신하게 했다. 요즘으로 치면 법원의 '사회봉사활동'선고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른데, 장관 중에 병역을 미필한 분이 한 분 계셨다. 이 양반, 국무회의 때마다 각하 뵙기가 영 죄스럽기 그지 없는 거 있지? 생각다 못한 장관께서 '국토건설단'에 자원. 6개월간 삽 들고 땅 파며 비지땀을 흘린 후 군복무를 대신, 장관 자리에 다시 복귀했던 일도 있었다. 특권층 자녀들의 병역 특혜를 막기 위해 지금도 시행중인 '특수층 자녀 관리' 지침이란 것도 바로 각하가 만든 것이다. 그런 각하에게 실세 장군 아들의 병역 기피가 걸려들었으니 꼼짝 마라지 별 수 있나. 아들의 한풀이를 화끈하게 해준 장군님은 스스로 예편을 했고 막강 아버지 그늘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놀아나던 장군님의 아들은 곧바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어느날 저녁 영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각하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텄다. "파출소 소장은 어떻게 처리하셨어요?" "원상복귀시키려 했는데 막무가내로 사직을 하겠다누만.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영부인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쳐갔다. 그리고 종래 아무 말이 없었다. 청와대 민원실엔 힘 없고 줄없는 민초들의 하소연이 하루에도 난지도처럼 쌓이는데 그 내용 또한 쓰레기 속마냥 가지각색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한번하고 싶다. 멋진 아이템도 있다. 그런데 돈이 없다. 그러니 청와대에서 조금만 투자하라…'는 얘기 하며, '어릴 때부터 주위에서 국방장관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다. 그러니 국방장관 아니면 차관이라도 시켜달라… ' '북한 김일성을 격퇴시킬 모책을 갖고 있다. 특수병력 50명만 지원해 달라… ' 돈 부탁, 취직 부탁, 도망간 마누라 수배까지 갖가지 사연들이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그거 다 읽고 들어 주다간 청와대 업무가 마비되고 국정이 중단된다. 해서 민원실 식구들이 일차 점검 후 정신병동 낙서 같은 건 걸러내 분리 수거시키고 진실성이 엿보이는 사연들만 추려 각하와 영부인께 진상되는데, 오늘 아침, 영부인께서 솎아 내고 걸러 낸 사연 한 장이 올라왔다. 어느 여인이 '눈물로 쓴 편지'였다. '지우개로 지우지 못'하는 애달픈 사연 …. 편지를 탐독하던 영부인의 두 눈에 이슬방울이 맺혔다. 엔간한 사연은 영부인 선에서 처리되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되 이번 건은 아무래도 각하의 힘이 필요한 모양이다. 대통령의 점심 식탁에 그 편지가 올려졌는데, 내용을 읽고 난 대통령이 즉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3공화국 최고 끗발 중앙정보부장을 호출했고 양 눈썹을 휘날리며 득달같이 달려온 정보부장에게 각하의 엄명이 떨어졌다. "이거 한 번 읽어봐. 내자가 편지 보고 울었어" "… …?" "그리고 처리 결과를 보고해 줘" 반드시 확인 내지는 짚고 넘어가겠다는 대통령의 의지 표현이었다. 이런 걸 '지상명령'이라고 하는데, 지상명령이나마나 먼저 내용부터 숙지해야 처리를 하건 말건 할 거 아닌가. 청와대를 나오는 부장께서 차안에서 그 내용을 훑었다. (존경하옵는 영부인님 전 상서 …)로 시작되는, 답십리 산다는 어느 가정 주부의 사연인 즉.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여인에겐 남편이 하나 있었다. 그 남편은 오직 돈밖에 모르는 순박하고 우직한 억척 사내였다. 여인 또한 '여필종부'의 전례를 따라 남편 못지않은 억척 아내로 부업전선에 나섰는데 남편 퇴근하면 마누라 야간 나가고 마누라 퇴근하면 남편 도시락 챙겨 출근하고 …. 그저 '돈밖에 없다. 돈 버는 게 오야다.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자'는 맹약 아래, 입을 거 안 입고 먹을 거 아끼며 개같이 벌기 십수년 …. 지성이면 감천이라 집칸 장만하고 적금 몇 개 타고 보니 천하의 정주영이가 눈 아래 노닐더란다. 남편이 가만히 생각컨대, 뭐 정주영이가 별건가 … ? 회사 간판 하나 걸고 밀어붙이면 나라고 사장, 회장 되지 말란 법 있나… 해서, 기술 부문에 하나, 영업 파트에 하나, 도합 두명의 동업자를 구해 회사 간판 하나를 달았는데, 이 동업자 두 놈이 '문제아'들이었다. 요것들이 슬슬 눈속임을 하며 어음도 빼돌리고 자재 구입부터 자금 결제까지 입질을 해대는데, 몰랐으면 모를까 그걸 알고 그냥 넘길 순 없는 일. 남편과 두 사람의 동업자간에 티격태격 입씨름으로 시작한 다툼이 급기야 펀치가 오가는 2대1의 리턴매치로 발전했는데 어느 축축한 날 저녁,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불쑥 나타나 불문곡직 잠자던 남편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싣고 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을 뭘로 어떻게 손을 봤는지 완전히 삶은 시금치에 성불구까지 만들어 집으로 되돌려 보내왔다. 궁금해 부르튼 여인이 대체 어딜 가서 누구에게 당했는지를 물어봤지만 겁에 질린 남편은 함구무언, 경찰도 아니고 누군지도 말 못한단다. 즉,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고, 알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얘긴데. 그렇게 남편이 숨죽인 파김치 되어 무엇엔가 겁을 먹고 두문불출하는 동안 회사는 어영부영 두 놈 동업자 손아귀로 넘어가 버렸다. 그야말로 '국 쏟고 발등 데고 그릇 깨고 부엌 어지럽히고 두들겨 맞고 보따리 싸서 쫓겨난, '개같은 경우를 당했는데, 여인이 가만 보니, 불문곡직 남편을 데려가 삶은 시금치 만들어 보낸 것들이 회사 삼켜 먹은 두 놈 동업자하고 '형님 동생'하며 어울려 다니는 거 있지? 그렇다면 대충 계산이 나오는 거 아닌가. 여인은 우선 남편 조진 놈들부터 고발을 했다. "이유도 없이 남편을 싣고 가서 저렇게 반병신을 만들어 보낸 사람들입니다. 지금 회사에 가면 그 사람들이 있어요. 체포해 주세요" 그런데 고발장을 접수한 경찰이 미적대며 세월만 죽이고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여인이 법 좀 알고 끗발 좀 있는 주변 사람에게 카운슬링을 했는데 "대체 왜 경찰에서 그 사람들 잡아넣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손을 좀 써봐 주세요" 사연을 듣고 여기저기 전화질을 해대던 경찰 간부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부인 , 무슨 얘긴지 나는 하나도 안들은 걸로 합시다" 이제껏 입술이 부르트고 혓바닥이 갈라지도록 설명했는데 이제 와서 안들은 걸로 하자니 …? "얘기했잖아요. 지금 회사에 가면 그 사람들이 있다구요. 진단서도 끊어 놨어요" "글쎄 난 한마디도 안들었다잖습니까. 돌아가세요. 가서 박사장 치료나 잘해 드리세요" 영문을 모르는 여인이 안타까웠던지 슬쩍 '어드바이스'를 해주는데, "계란으로 바위 치기입니다. 그쯤만 알고 포기하세요. 자꾸 깊이 파고들면 오히려 남편이 구속되는 수가 있어요" 법치국가에서 두들겨 맞은 놈이 잡혀드는 묘한 법이 있는진 무식한 여인으로선 알 길 없다만, 왜 자꾸 깊이 파고들면 남편이 구속되는지 그 사연은 알아야 할 터, 높은 분이 여인의 궁금증을 풀어 줬다. "박사장 말요, 자가용에 비상 라이트는 왜 달고 다녔대요. 그래" 남편은 고물 자가용을 하나 끌고 다녔는데 우쭐한 기분에 비상 라이트를 달고 다녔고 그게 기관원 사칭으로 신고가 되었단다. 그러나 남편 끌고 간 그 친구들이 누군지는 끝내 함구무언으로 일관했다. 아니 그래, 그런다고 느닷없이 잠자는 사람을 끌고 가 개 패듯 두들겨 놓고도 모자라 성불구까지 만들어? 무전기라도 달았음 '집게'로 뽑아 버렸겠네, 그려. 여인네 한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댔다. 독오른 여인이 검찰, 법원, 청와대까지 탄원서를 올렸지만 하나같이 돈 먹은 벙어리 저금통들이라. 급기야 영부인께 다이렉트로 붙은 건데 …. 사연을 읽은 정보부장님이 대충 감잡혔다. 그리고 즉각 경찰도 손 못 대던 두 사내를 '차렷, 열중 쉬어'로 대령시켰다. 역시 부장님은 대단하셨다. 그런데 얘네들 얘기를 들어보니 여인의 편지 내용이 전혀 '아니올시다'인 거 있지? 탄원서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고 사기고 지어낸 스토리란 얘기들인데, 부장님께서 한참을 헤매었다. 이 경우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 진퇴양난의 코너에 봉착한 부장님께서 그럼 피해자 회사 말아 먹은 동업자하고 어울려 형님, 동생 한 건 뭐냐고 역습을 했다. "동업자라니요, 우린 그 사람들 얼굴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잘못 알았거나 고의로 우릴 엮어 넣으려는 수작일 겁니다. 부장님 " 이 친구들 얘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어느 파출소 소장으로부터 '네 젊은 놈 하나가 비상 라이트를 달고 기관원 행세를 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냐'하는 신고가 들어왔단다. 해서 '그런 분이 계시면 쓰나… '하며 즉각 달려가 사무실로 정중히 모셔오서 좀 타이르고 논리적으로 설득도 시키고 하는데 … 갑자기 혼자 발작을 하더란다. 겨드랑이 털 한 가닥 손대지 않았는데, 칠성판에 뒤집어 엎어 놀고 물같은 거 전혀 먹인 적 없는데 막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까 뒤집더란다. "야, 그거 정찰 환장하겠습디다" "정말이에요. 우리가 욕이라도 했으면 부장님 아들입니다" 부장 아들까지 걸고 설명을 해대는데 … 그래서 당황한 두 친구가 그 친구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아주 정중히 모셔 갔단다. 그리고 주머니까지 털어 의사 진찰을 받게 해줬는데 의사 말씀이 그 친구에게 원래부터 간 질환과 심장병이 있었단다. 그래서 집구석에 가서 마누라 간호받으며 병이나 잘 치료하라고 택시 태워 정중히 되돌려 보내 준 건데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 공무원 신분으로 그만한 대민 봉사는 기본 아니냐, 하는 두 친구의 논리인 바, 부장께서 내심 다행스럽게 여기며 마지막 마무리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 증거 있어? 간질환, 심장병에 대한 의사 진단서, 그 친구가 기관원 행세했다는 증거 말야" 두 친구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미리 준비해둔 증빙 자료들을 부장 코앞에 디밀었다. 의사 진단서, 비상라이트를 부착한 자동차 사진, 그리고 신고 파출소 소장이 작성했다는 기관원 사칭 혐의 사실 내용… 부장님에서 외려 미안해지셨다. '이렇게 착한 애들을 각하 말만 듣고 악질 기관원으로 취급하다니… 이 못난 부장을 용서해다오…' 이튿날, 의기양양해진신 부장님께서 대번에 각하를 찾아 뵙고 들은 대로 활활 보고를 했고 각하께선 또 고 사연을 그대로 영부인께 줄줄 전달해드렸는데, "임자가 당한 거야. 그러게 사람 말이란 한쪽 말만 듣곤 모르는 거지 " 영부인께서 생각해 보니 괘씸하기가 그지없다. 어디 물먹일 곳이 없어 감히 영부인에게 사기를 치고 물을 먹여 …? 영부인 체면이 뭐가 됐나? 정보부장이 뭐라고 할 건가, 그래. 영부인도 화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진 잘 모르겠다만, 어쨌건 화가 나신 건 확실했다. 그리고 배신감도 드신 모양이다. 인터폰으로 부속실 직원을 호출하는 목소리에 전에 없던 노기까지 띠고 있었다. "김비서 좀 올라오시겠어요?" 영문을 모르고 달려온 비서관에게 문제의 진정서를 내밀었다. "이 여자 찾아가서 이거 돌려주고 좀 따끔하게 일러주고 오세요. 글은 잘 쓰는데 왜 사람을 농락하느냐구요" 문을 열고 나가는 비서관에게 영부인이 덧붙였다. "너무 심하겐 하지 말고 그냥 말로만 전해요" 비서관께서 즉각 그 여인을 수소문, 여인의 남편이 입원해 있다는 병원을 찾아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며 청와대 제2부속실 직원이라고 밝히자 여인이 좋아라 반기는 거 있지? 청와대서 왔다니 자신의 글발이 먹혀든 거란 착각의 자유 때문인즉, 잠시 후, 꿈을 깨고 현실을 직시한 여인의 표정은 차라리 참담했다. 비서관이 내민 자동차 사진, 병원 진단서, 그리고 파출소장의 혐의 사실 내용들…. 덧붙여진 영부인의 진노 각서와 비서관의 책망…, 이 모든 게 한데 어우러져 전달되면서 여인의 안색을 돌변케 하더니 급기야 이목구비가 일그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영부인께서도 결국 그렇고 그런 분이셨군요. 믿은 내가 잘못이지 … " 이 여자가 진짜, 무슨 일 내겠네. 이거…. 어딜 감히 영부인께 악담 비슷한 걸 늘어놓나, 놓길…. 심히 불쾌해진 비서관이 남편 침대 모서리 시트커버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여인의 등을 잡아 세우며 한마디했다. "이거 보세요, 아주머니, 지금 누구에게 하는 얘깁니까?" 여인이 눈물로 도배질된 얼굴을 쳐들고 악을 쓰듯 내뱉었다. "여기 담당 의사에게 물어봐요. 우리 남편이 언제 간질환, 심장병 같은 병을 갖고 있었는지" 이거, 얘기가 또 다르다…. 여인의 고함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남편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니 눈동자에 구심점이 없는 게 말 그대로 정신병자의 표준 사이즈라… .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비서관은 영부인께서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꼈다. 각하에게 올려져서 영부인께 전달된 정보부장의 보고에 허점이 있다는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예감처럼 와 닿는데 …, 여인의 울음 섞인 설명이 그걸 더욱 확고하게 굳혀주고 있었다. "저이가 자동차에 비상 라이트를 달고 다닌 건 사실이에요. 그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해요" 그러나 그건 그냥 우쭐한 기분에 그랬을 뿐, 누굴 잡고 기관원 사칭하며 사기친 적이 있나 그 피해자가 있음 자기도 보고 싶으니 한번 찾아 데려오란다. 비서관 생활 2년 몇 개월만에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난감해진 비서관께서 이왕 온 김에 확인이나 하자고 담당 의사를 면담했다. 여인의 말 대로라면 얼마 전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어딜 한번 다녀오곤 저토록 삶은 시금치 꼴로 반 정신병동 환자가 되었는지 의사는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담당 의사는 확신에 찬 카운슬러를 해주었다. "누가 그런 소릴 해요? 거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구먼. 환자는 담당 의사가 누구보다 잘 일고 있는 법 아닙니까? 저 환자에겐 애초 간질환이나 심장병 같은 건 … " 애초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현재의 체질상 그건 의학적으로도 해석이 인된다는 얘기였다. "그럼 지금 저 상태의 원인은 뭡니까?" "글쎄요 뭔가 강한 쇼크를 먹은 것 같은데 그걸 도통 모르겠단 말입니다. 대체 뭘로 사람을 어떻게 했기에, 상처 하나 없이 단 며칠 새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지 원…, 누군지 모르지만 기술도 … 참 … " 때린 흔적은 없다. 그러나 엄청난 충격을 받아 혼수상태다. 사기당한 피해자도 없는데 신고는 들어왔다. 증세도 없는 간 질환, 심장병 진단서는 또 뭔가? 이거, 무슨 '아가사크리스티'의 추리극 장난도 아니고 왜 사람 혼돈되게 하는가 도대체 …. 도무지 풀길 없는 수수께끼에 지친 비서관이 한 가닥 실마리를 정돈했다. 이성을 찾자.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윗분들의 판단이다. 괜스레 일개 비서관 주제에 상황 판단을 주관식으로 풀려들면 점점 더 꼬인다…그냥 보고들은 그대로, 객관식에 입각해서 보고하는 게 오야다… ! 비서관의 객관적인 판단 보고가 영부인께 전달됐고 그 보고는 또 한점 빠뜨림 없이 영부인의 입을 통해 각하에게 전달됐는데, 각하께서 비서관을 직접 불러 독대했다. "보고 들은 대로 얘기해 봐, 그 여자 만나 봤어? 그래, 뭐래? 담당의사가 아니랬다며? 그 남편이란 사람, 입원해 있는 친구 말야. 상태가 어떻대? 김비서관이 보기에 일부러 그러는 거 같진 않았어? 사람들 진실성은 있어 보여?" 각하도 성급하시긴 원. 아무리 궁금하시다 손, 차근차근 하나씩 물어와야지. 한꺼번에 죄다 하문하시면 답변할 순서를 어떻게 정하나, 그래. 김비서관이 나름대로 정리를 하여 가감 없이 각하의 궁금증을 죄 해소시켜드렸는데, 각하도 듣고 보니 미심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 … ?" 이 경우, 올라오는 보고가 상반된 경우, 각하께서 '그래 …?' 한 경우, 필연적으로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국가 안보를 근거로 불철주야 정보를 껴안고 뒹굴며 날고 기는 분들의 코털까지 한을 남김없이 파악하고 계시는 분, 끗발로 계산하면 3공에서 앞지르기 할 사람 없는 분, 각하에게 부하 직원 얘기만 듣고 그대로 옮긴 막강 중앙정보부장님 …, 그 막강 정보 부장님 양다리에서 비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김비서관의 현장 보고에 의구심을 느낀 각하께서 재출두를 요구하신 거라…, 눈썹을 흩날리며, 쌍방울을 흔들며 달려온 정보부장에게 각하께서 며칠전의 정보부장 보고서를 꺼내 보였다. "이거 말야" 각하의 모션을 보아 뭔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예감이 부장의 뇌리를 스쳐갔는데 …. "임자가 올린 보고서 이거, 확실해? "무슨 말씀이신지 … ? "기관원 사칭했다는 친구. 다시 한 번 조사해 보라구. 무슨 말인지 임자 알아들어?" " … … ?" "임자 입장에서야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야" "각하, 그 일이라면 이미 며칠 전에 …" "김부장 보고대로가 아닌 것 같아. 임자 부하들 얘기만 들었지 상대방 얘긴 안들어 봤잖아" "… … !?"' "병원에 가봐. 김부장이 직접가서 만나 얘길 들어 보라구" 가라시니 가긴 가야겠는데 … , 이거 꼭 이럴 필요가 뭐 있나 그래? 산더미 같은 국정은 말할 나위 없고, 그따위 여편네 탄원서 한장에 매달려 정보부장님께서 몸소 병원까지 행차를 해야 할 이유가 뭔가 말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나…?' 해버리면 될 일 가지고 원 …. 그러나 그건 정보부장님의 개인 생각일 뿐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보아하니 각하 나름대로의 라인을 통해 보고를 받고 있는 모양인데 자칫 잘못하다간 각하에 해한 신임이 걸린 문제 아닌가? 정보부장은 지체없이 각하의 주문대로 만사 제치고 병원엘 달려갔다. 그랬는데 … , 부장님께서도 김비서와 꼭 같은 레퍼토리를 접하게 된다. '담당 의사에게 물어봐라. 심장, 간 질환이 있었는가… 비상 라이트는 인정한다. 그러나 사기친 적은 없다. 사기 피해자 있음, 한번 데려와 봐라!' 부장님의 뇌경막이 지상 최대의 헷갈림으로 분주하게 요동치는 거 있지? 김비서관의 행적을 부장님도 풀 코스로 답습하며 담당 의사로부터 같은 주문을 받았다. "거참 신기하더만요? 대체 뭘로 손봤대요? 어떻게 했기에 멀쩡한 사람을 단숨에 저렇게 만들 수 있대요? 우리 집구석에 손 좀 볼 개망나니가 하나 있는데 어떻게 그쪽으로 보내 보링 좀 시켜내보내 주면 좋겠는데 그 사람들 만나 볼 수 없겠수?" 돈 쳐발라 학위까지 딴 의사선생님이 그런 소리까지야 했겠냐만, 의사 소견이 대충 그랬다는 얘기를 약간 과장시켜 설명했다. 한치의 오해나 곡해 내지 음해 공작이 없길 바란다. 바라고… 뇌리에 한짐 가득. 무거운 짐 보따리만 확인하고 병원을 나온 부장님께서 각하에게 보고 들은바 그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다. (단소의 의문점은 있으나 요원들의 보고서엔 믿을 수 있는 증빙자료가 있음. 따라서 이 사건은 자체 기관에 맡겨 처리하심이 좋을 것으로 사료됨) 그러나 그건 각하가 바라던 보고서가 아니었다. 각하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아든 거 같은 게, 막말로 정보부장인들 제 새끼 잡아먹을 일 있겠나… ? 문득, 간밤 영부인의 어드바이스가 각하의 기억 세포를 후려치며 되새김질시켰다 "알고 계세요? 항간에 기관원들 횡포가 심하다는 소문 말예요.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고 대통령을 욕할 거 아녜요?" 욕먹는 거야 뭐 대순가… 끗발을 바탕 삼아 민폐를 끼치니 그게 문제지 …. 각하는 고뇌에 찬 결단으로 시경국장을 호출했다. 그리고 정보부와는 별개의 채널로 수사를 지시했는데 … "드러나지 않게 조사해봐요. 내 말뜻 알겠지요?"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이 시경 국장님…, 각하 앞에서 명심하겠다고 굳게 언약(?)을 하고 물러나온 양반이 수사를 하는 건지, 갑사 망사를 짜는 건지 여기저기 안테나를 곧추세워 이눈치 저눈치 사방 분위기를 계산한 후 자기 판단을 섞어 보고서라고 올렸는데 이 한여름 삼베 바지 방귀 새는 것 같은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 즉, (사칭한 것 … 심증이 감. 고문한 흔적 … 심증이 감. 피해 당사자의 억울한 주장도… 심증이 …) 이것도 심증이 가고 저것도 심증이 가고 그러니 판단은 각하에게 맡기겠다는 얘긴데, 별 이상한 시경국장 다 보겠네, 진짜! 책상머리에 앉아 수사를 다 해치워 버리질 않나…. 각하께서 제2부속실의 김비서관을 은밀히 부르셨다. "시경국장 이 친구 힘으론 안되는 모양이야" 그리고 '대통령 친서'를 하사하셨다. "임자가 그거 들고 한번 뛰어봐" 김비서관은 일단 시경국장에게 달려가 각하의 친서를 내밀었는데. 각하의 친서는 맨 밑에 선명하게 쓰인 대통령의 ''자 사인만큼이나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향후 탄원서 사건에 관한 조사는 김비서관의 지시를 받을 것. 시경국장의 입지도 묘하게 됐다만, 묘하게 된 건 김비서관 쪽이 더욱 그랬다. 졸지에 '탄원서 사건 수사 본부장'의 막중 임무를 배정받은 김비서관께선 팔자에 없는 탐정놀이에 직급에도 없는 시경국장까지 산하에 두게 됐는데 언제 한번이라도 '피해자' 진술조서를 받아 본 적이 있나. 그렇다고 '피의자' 심문조서를 꾸며 본 적이 있나. 시경국장의 수사 진행만 독촉하며 지켜 볼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차, "김비서관. 어때요? 김비서관도 심증이 가죠? 고문당한 것도 심증이 가요" 시경국장께서 중간 수사 보고란 걸 하면서도 또 '심증'타령을 늘어놓는다. "그렇다고 또 정보부원들만 욕할 수도 없는 게 입원한 친군가 기관원 사칭한 것 또한 심중이 간단 말요" 도라지 타령, 방아 타령이면 가락이라도 있어 흥이라도 나겠는데 이놈의 '심증 타령'엔 장단도 박자도 없는 게 문제라… . 김비서관이 신물나는 심증타령에 시달리고 있을 때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영부인의 노기 어린 음성이 전파를 타고 김비서관의 고막을 진동했다. "아직도 진상 파악이 안된다군요? 정보부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군요 대통령 친서도 안 먹혀든다니 말예요" 원래부터 정보부를 탐탁지 많게 여겨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시는 건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됐어요. 시경 국장에겐 수사 종결 짓고 철수한다고 얘기하고 들어오세요" 들어오라는 건 청와대로 원대 복귀하라는 말씀이신데, 몇 가지 옵션을 거셨다. '대통령 집무실쪽 정문으로 들어오지 말 것. 반드시 정원쪽으로 나 있는 뒷문으로 들어올 것. 영부인께서 미리 집무실에 나와 있다가 김비서관이 정원에 보이면 뒷문을 열어 놓겠음' 왜 여사께서 영부인답지 않은 페이트모션을 쓰느냐… ?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한 가지 인수분해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청와대 깊은 골의 얽히고 설킨 권력의 함수관계…. 예를 들어 김비서관이 드러내 놓고 사건 조사를 한다 치자. 해서, 각하나 영부인께 지시받고 보고하러 정문으로 들락거려 보라. 이게 재깍재깍 다른 윗선으로 보고가 되고, 윗선은 또 윗선끼리 채널을 풀 가동시켜 주고받으며 서로의 협조체제를 긴밀히 다져 나가면서 영부인이나 각하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두 가지 문제를 만들어 내는데 그 첫째가 수사의 방해공작이다. 생각해 보라. 김비서관의 행동 반경과 스케줄을 빤히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터에 앞질러 증인들 입에 반창고 발라 버리면 대통령 친서 아니라 토마호크 미사일을 갖다 들이대도 소용없다. '친서는 멀고 기관은 가깝다… '는 옛말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된다, 되고…, 두번째 문제는 김비서관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왜냐… ? 각하 빽 믿고 설치다가 밉보이면 그 대가를 어떻게 감당할 건가. 상대는 장차관들도 요리하는 막강 정보부장님이시다. 만에 하나 김비서관에게 노골적인 외압이라도 넣으면 그걸 거절할'힘이 없다는 얘긴즉,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정보부에 얽힌 얘기 하나 하고 넘어가자. 육군참모차장하고 맞먹는 일등병이 있었다. 별 세개 하고 같이 점심 먹고 차도 마시고 골프도 치는 깡통 계급의 어린 친구,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3공의 2인자 김종필 정보부장하고도 막 어울렸다. 당시의 날고기는 정 관계 인사들은 눈 아래 내리깔고 놀았다. 그에겐 '야간 통금'이 적용되지 않았다. 밤늦게 술이라도 한잔 걸칠라치면 남산의 '회사원'들이 에스코트를 했고 그의 집에 작은 일이라도 생길라 치면 관할 파출소에서 득달같이 달려왔다. '金군' 또는 '미스터 김'으로 통칭되던 그는 유명한 국가 대표급 프로 골퍼였다. 군에 입대해서는 육군참모차장의 골프 선생님으로 활약했고 제대 후엔 국무총리, 장관, 역대 정보부장들의 골프 스승님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김형욱 정보부장의 골프 취미는 도를 넘어 광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피나는 연습과 눈물나는 자기 노력으로 김형욱은 실력을 닦아 나갔다. 새벽은 물론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골프장으로 달려가 샷을 날렸는데 그 옆엔 언제나 '미스터 김'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수시로 '김형욱 주최, 정관 , 재계의 알아주는 분들 초청 골프연습회 '가 열렸고, 그때도 비빔밥에 올라붙는 고추장처럼 '미스터 김'이 초대되어 참석인사들의 모션을 교정해 주며 지도 편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가히 3공의 로열 패밀리 그룹에 둘러싸여 놀았다. 국무총리도 '김군… -' 각부 장관님들도 '미스터 김 … ? 한여름 빙과처럼 불티나게 팔려 다니고 불려 다녔는데 더욱 바쁜 상황이 생겼다. 급기야 핸디9의 싱글을 갖춘 김형욱은 정보부 내 실국장들에게까지 골프 바람을 일으켰고 실국장들은 '미스터 김'에게 한수 가르쳐 달라 개떼(?)같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주가가 상종가로 치달으며 끝간 데 없이 치솟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상종가로 치솟은 인기 주식엔 '사자' 주문이 몰리지만 매물이 달리는 법, 배우자 덤비는 친구들은 국도변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는데 '미스터 김'의 몸은 하나라. (다음호에계속) 동백아가씨와 영부인【】 "아우님! 나도 나라 위해 일하고 싶네" “아무래도 맘이 안놓여 안되겠어요. 김비서관이 내려가 병원을 찾아 보고 와 주세요.”그러니 어쩌 겠는가, 다시 핸들을 꺾어 처녀가 입원해 있는 병 원으로 밤길을 재촉하는 김비서관에게 영부인의 당 부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곳 치안 책임자에게도 너무 걱정 말라고 전하 세요.” 별 걱정을 다한다고 김비서관은 생각했다. 다친 사람이 문제지 그곳 치안 책임자가 무슨 상 관인가…? 그랬는데, 웬일이니…? 정작 병실에 누운 처녀와 가족들은 과분한 영부인 의 관심에 고개를 조아리고 감사를 드리는데 병실 을 지키고 있던 도경국장이 사색이 되어 김비서관 을 복도 저편으로 끌었다. “아무래도 제가 사표를 써야겠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김비서관께서 되물었다. “아니, 사표라니요.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설마 이런 일이야 있을까 하고 미처 도로 통제 를 하지 않았습니다. 영부인께서 얼마나 놀라셨겠 습니까, 아까 보니 여사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 얗게…” “난 또…, 걱정 마십시오. 그러잖아도 내려오려는 데 영부인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다친 사람도 사 람이지만 아마 그곳 치안 책임자 역시 많이 놀랐을 거다, 위로해 드리고 오라…’고 말입니다.” 이양반, 도경국장님…눈에 한가득 눈물을 글썽이 는 거 있지? 그리고 김비서관은 영부인의 세심한 배려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는데, 훗날, 영부인은 김비서관에게 이런 얘기를 하며 숨을 몰아 쉬었다. “만약 그때 그 처녀가 죽기라도 했다면 아마 난 평생 가책을 느끼며 살아야 했을 거예요. 지금도 그때 그 처녀가 무사해 준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우리…, 얘기 꺼낸 김에 대통령 친인척 얘기 몇 개 더 짚고 넘어가자. 61년 최고회의 의장 시절…, 고향 상모리에서 농사 짓던 형님 한 분이 각하를 찾아오셨다. 그리곤 심각하게 카운슬링을 해오셨는데…, “아우님…” “말씀하십시오, 형님” “고향 사람들이 날보구 이젠 나라를 위해 뭔가 해보라구들 하누만, 헛헛…” “……” “나두 가만 생각해 보니 아우님을 뒤에서 도와주 는 일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고 해서 말이네 만 이거 한번 봐주시게…” 몇 가지 준비해온 청사진을 앞에 펼친 후 자신의 ‘범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타진했다. ‘그래서 얘긴데 기왕 하는 거 건설업이 좋겠나, 철강산업이 좋겠는가. 자금은 걱정할 거 없다. 뒤에 스폰서 대려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애국심도 강하 고 아주 착실한 사람이다. 아우님이 불러 준다면 언제 한번 데려와 인사를 시켰으면 한다…’ 그런데 각하께서 그 청사진이란 걸 가만 들여다본 즉, 이게 하나같이 정부 발주공사라. 분명 어떤 놈이 순진해 터진 노인네를 꼬드긴 게 분명할 터…, 막무가내로 덤비는 형님을 일단 시골 로 내려보낸 후 고향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나, 최고회의 의장이오.” “네, 넷! 각하!” 그러잖아도 최고 끗발 피붙이가 사는 동네라 늘 긴장 속에 근무하던 경찰서장이 느닷없는 ‘박각하 ’의 전화를 받자 온몸의 신경세포가 조직 조직을 곧추 세우며 자신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취하게 했 다. “오늘부터 우리 형님 댁에 경찰관 배치해서 보초 좀 세워 주겠소?” 그야 이르다뿐인가. “걱정 마십시오, 각하. 그러잖아도 그 댁엔 수시 로 순찰을 강화해서 신변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 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이 친구가 촌구석에 있어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각하의 뜻은 그게 아니다. “형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요. 그 사람 들 빠뜨리지 말고 체크해서 보고해 주시오.” “아니 각하…, 만나시는 분들을 모두 말입니까?” “그래요,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구.” 시골 서장이 의장각하께 왜 그래야 하는지를 따져 물을 수야 없다만 아무래도 느껴오는 감이 자신의 생각하곤 핀트에 오차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아무 려면 어떤가. 즉각 각하 형님의 사립문 앞엔 경비경찰이 일몰에 관계없이 말뚝을 박아 섰고 눈치 없이 들락거리는 인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빠짐없이 체킹, 보고되 면서 농사만 짓던 순박해 터진 양반에게 바람 넣어 부추긴 업자들에겐 즉각 세무 조사가 들이닥치고 겨드랑이 속털까지 낱낱이 인수분해되어 하루 아침 에 새벽 서리를 맞게 되는데, 각하 형님께선 그 후 느낀 바 있어 일체의 청와대 출입을 삼가, 대통령 취임식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오히려 민망해진 각하께서 청와대 방문을 권했지만 형님은 딱 잘라 거절했다. “주변에 얼쩡거리면 그것도 폐가 돼.” 혁명이 성공하고 다시 민선대통령으로 각하가 당 선되자 친인척 몇몇이 대거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서울로 보따리 싸들고 거주 이동의 자유를 감행했 다. 반도남단을 좌지우지하시는 명색 이 땅 최고 끗발 대통령 각하의 피붙이들 아니신가. 시골 무지렁이로 촌구석에 틀어박혀 쟁기질만 할 수 있나…? 중앙으로 진출해서 그 좋다는 시발택시도 타보고 자식들 앞날도 개척해야지. 그 와중의 어느 날 각하가 느닷없이 민정수석을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 “자네 우리 누님 회갑잔치 한 거 알고 있었나?” 각하에겐 생존해 있는 누님이 한 분 있었고 그 누 님은 각하가 어려울 때 가장 살뜰히 보살펴 준 피 붙이였다. 그 누님의 회갑연을 각하께선 그냥 넘기고 지나 버렸는데 명색 대통령이 되어 한 분 계신 누님의 회갑을 챙겨 주지 못했대서, 그래서 화가 나셨나…? “가족끼리 조촐하게 치르실 거라고만 전달받아 보고를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대체 민정수석이 뭐 하는 게야?”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안 좋았다는 걸 눈치는 챘 다만 그만한 일로 화를 낼 건 또 뭔가? 각하의 노성은 집무실 천장을 울렸다. “한쪽에선 물난리가 나서 아우성인데, 뭐?” 그해, 전국을 적신 장마비가 수재민을 속출시키고 있었다. “아니, 고급호텔 아니면 회갑 잔치 못한대?” 얘기가 이상해진다. 그렇다면 누님의 생신을 알려드리지 않아 화나신 게 아니란 건가…? “그 자리 누가누가 참석했는지, 그리고 음식값은 누가 계산했는지 알아봐, 당장!” "대통령 누나라고 호화판 회갑연을 해?" 그제야 어렴풋이 감을 잡은 민정수석께서 안테나 를 풀 가동시켜 그날의 상황을 알아본즉, 이렇다. ‘살아 생전 한번뿐인 회갑연, 이왕 하는 거 호강 한번 시켜드리자…’해서 자손들이 한판 거창하게 판을 벌였고, 호텔 뷔페값도 각자 주머니를 털어 계산했다. 아무 하자 없잖은가… 민폐를 끼친 것도, 대통령 누님 행사한 것도 없다. 지금 민정수석 손에 들려 있는 그날의 계산 영수 증이 그걸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는데, 문제는 청 하지도 않은 불청객들이 귀신같이 탐지하고 득달같 이 달려와 봉투에 부조금 헌납한 후 각하 누님께 앞다퉈 눈도장 찍고 간 몇몇 인사들에게 있었다. 민정수석이 도출해 낸 각하의 진노는 두 가지로 정리됐다. 전국이 홍수로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이 정국에 아무리 일생에 한번뿐인 회갑연이라지만 대통령 누 님쯤 되는 사람이 분별없이 호텔 뷔페로 소문난 잔 치를 벌였다는 게 그 첫번째 이유고, 대통령 누님 행사란 단지 그 하나 때문에 파리떼처럼 엉겨 붙은 몇몇 고위층이 그 두 번째 진노하신 이유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애초 인척들이 보따리 싸들고 서 울로 올라올 때부터 각하의 심기가 편치 않았고 그 들이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걸 보면서 줄곧 신경쓰 였던 게, 그들 친인척 주변에 엉겨붙어 구린 소문 을 생산해 낼 ‘파리떼’들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깨끗이 해도 이 파리떼들이 옆에서 부추기면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게 인간의 생리이 자 고금의 진리요, 권력 주변의 산 역사가 아닌가. 바로 그 파리떼…들, 대통령 누님 생일잔치에 불 청객으로 끼어들어 눈 도장 찍었던 그 몇몇 인사 들…, 지금 볼기짝에 불붙었다. 엉덩이를 들었다 붙였다 요동들을 치는데…, 듣자 하니 각하가 진노하셨단다. 대통령 누님 앞에서 재롱 떨었다고. 각하 피붙이한테 엉겨붙어 쓸데없는 커넥션을 조 장하려 했다고. 그래서 각하의 혁명 의지에 흠집을 냈다고. 부조 한번 잘못 내고 때아닌 된서리를 뒤집어쓴 인사들이 저마다의 안테나를 청와대로 집중, 이제 나 저제나 벼락이 내려 칠 때만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차, 민정수석의 교신이 전달됐다.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각하께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수화기를 든 손에 긴장들이 풀리면서 오장을 쓸고 뿜어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광화문을 타고 성북동을 휘감아 삼청동 고급 주택가를 진동시켰는 데 민정수석의 경고가 대통령의 이름으로 덧붙여졌 다. “그리고 각하 누님은 높은 분들 하고 고급호텔에 서 식사하실 그런 호사스런 분이 아니니 추후 이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 해달라는 당부 말씀이 계 셨습니다.” 고급호텔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뭐 따로 정해져 있 을까만, 추후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나? 며칠을 노심초사 피를 말린 걸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 지옥을 다시 리바이벌하라구? 천만에 말씀이고 꿈에라도 재탕될까 두려운데 추후 그런 일이 왜 생겨? 느낀 바 있는 이 인사들은 그로부터 몸가짐을 단 정히 하고 각하 누님 곁에는 비록 먼 발치라도 얼 씬거리는 걸 삼가며 그림자도 안 밟으려 자나깨나 신중을 기했다. 서울 한복판, 절해고도에 누님을 유폐(?)시킨 대통 령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누님께 고향으로의 귀 향을 권했는데 각하 누님의 거부 의사가 상당히 합 법적이었다. “대한민국엔 거주 이동의 자유가 있는데 대통령 누나라고 특혜를 누리면 쓰나?” 얘기가 잠시 국도로 빠졌다. 영부인의 ‘동백아가씨’로 원위치시켜 논스톱으 로 달리자. 영부인에게 전달된 사연인즉, 충청도 양반골 어느 조용한 민박 마을에 허우대 잘생긴 서울 총각하나 가 고시공부하러 기어들었고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 지 어쨌는지 하필 과년한 딸을 둔 집에 여장을 풀 었다. 이목구비 수려한 서울 총각과 한창 무르익어 터질 것 같은 때묻지 않은 시골 처녀…, 만남부터가 노 사연의 ‘우연’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고 아픔의 씨앗은 그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예감되고 있었다. 대개가 그러하듯이 이 ‘한국판 러브스토리’는 ‘갑돌이와 갑순이’로 시작되었다. ‘가압~돌이이와 가압~순이이는 한 마을에 사알았 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아음뿐이래요~’ 헷갈릴 거 없다. 독자들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해소시키고자 뮤지컬로 얘기를 풀어 나가는 작가의 발상이니 일체의 오해나 혼동이 없길 바라는데 ‘겉으로느은~으으으음 으으음, (빠른 템포로)안 그 런 척… 했더!’ 이 부분부터 노래 가사와 무관한 방향으로 둘의 사연이 발전했다. 두 사람은 달빛이 찰랑대는 시냇가 여울목에서 모 종의 통속적인 수순을 밟은 후 갑돌이의 굳은 새끼 손가락 약속도 주고받았다. 그리고…, 동백아가씨의 각본대로 갑순이는 모든 걸 바쳐 갑돌이에게 헌신했는데, 그렇게 아낌없이 ‘너에게 나를 보내…’줬는데 불행(?)하게도 갑돌 이가 고시에 덥석 붙어 버린 거 있지? 고시 패스한 게 왜 불행으로 ‘표현’되느냐구…? 갑순이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됐다는 얘기다. 갑돌이 얘가…, 화장실 갈 때하고 나올 때하고 달 라지는 거 있지? 새끼손가락 걸고 ‘싸나히 목숨 걸고 바친 순 정…’이 어쩌고 맹세했던 걸 망각의 세월로 묻고 ‘모든 걸 배상하겠다. 위자료도 달라는 대로 주겠 다…’ 그러니 한때의 불장난으로 넘어가고 관계를 청산 하자는 얘긴데 제 세상 만난 갑돌이야 그랬음 딱 좋겠지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무작정 바쳐 죽도 록 사랑한 갑순이는 도대체 뭔가. 여자, 독 오르면 삼복에 한파가 몰아친댔다. 그 한파의 강도는 몸 바쳐 사랑했던 애정의 강도 와 반비례한다. ‘모든 걸 바쳐 뒷바라지했는데 배신을 당했다. 인간의 배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한번 본때 를 보여주마!’ 그런데 상대가 누군가? 법을 전공한 사법 연수생 이시다. 무식한 시골처녀가 섣불리 덤벼들었다간 외려 덤 터길 쓸 판이라…, 궁리에 궁리를 거듭, 급기야 청와대 계시는 영부 인께 ‘전상서’를 띄워 하소연한 건데, 써 올린 글로만 보면 ‘같은 여자 입장에서 어떻게 했음 좋 겠느냐…?는 단순 카운슬러지만 영부인의 성격상 이게 단순히 카운슬러로 끝낼 문젠가 어디…. 갑순이의 작전은 적중했다. 원래 남자의 외도나 불륜은 그냥 넘기지 못하고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여사님이셨다. 대문 앞에 별판을 단 관용차와 고급 승용차 가 골목을 메웠다… 이게 입에서 귀를 거쳐 한 사람 건너 두 사 람…, 엄청난 소문을 잉태했다. “각하의 측근 김재규에게 불륜의 씨앗이 있 었다!” “생일잔치가 국경일보다 더 뻑적지근했다더 라!” “선물로 들어온 금반지만도 수십 가마가 넘 었댄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나쁜 소문만 찾아들기 마련, 이 소문이 육여사의 비위를 잔뜩 상하게 했던 거다. 어떻게 일국의 장군 이, 그것도 각하의 아낌을 받는 사람이 요정 마담한테 빠져 아이를 얻고, 그것도 모자라 집을 사주고 벌건 대낮에 보란듯이 아이 생일 잔치를 벌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도대체가 말이 안되는 얘기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군의 요직에 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여사는 자신의 안테나를 총동원해서 김재규 의 비청교도적인 사생활을 쉴새없이 수집했 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대통령에게 김재규의 부 당성을 지적하며 끊임없이 사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자의 좁은 소견으로만 치 부하려 들었다. 남자로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대통령 자신도 늦둥이 ‘지만이’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있나. 더욱이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동병상련을 갖 는 건 그 자신도 부모가 맺어 준 본처를 버리 고 한때 어느 여대생과 사랑에 빠졌다가 지금 의 영부인을 만난 ‘전과’가 있다. 어쩌면 대통령의 지난 역사로 인해 영부인은 더욱 김 재규의 외도를 저주했는지도 모른다. 김재규 에 대한 여사의 노골적인 불신은 청와대 구중 침서의 부부싸움까지 연출시켰고 그 얼마 후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이란 막강한 요직에서 밀 려나 한동안 ○군단의 군단장으로 한직에 머 물러 있어야 했다…. 그렇듯 남자의 외도에 있어 여사님은 단호했 다. 그런 영부인에게 동백아가씨의 사연은 충분 히 공감대를 형성시켰고 남자의 배신이 누구 보다 괘씸스럽기 그지없이 각인되었다. 얼마전 연희동 교통사고 건으로 아직 심기가 덜 풀린 각하에게 동백아가씨의 사연이 여사 님의 손에 의해 전달됐다. “또 뭐야?” “한번 읽어 보세요.” 단숨에 주욱 읽어 내려가는 대통령의 표정은 영부인의 기대와는 달리 덤덤하기만 했다. “남자 쪽이 좀 심했구먼.” 이 경우 영부인은 맥이 빠진다. 겨우 그 정도 반응이나 얻자고 영부인의 금 쪽같은 시간을 할애하여 달려온 게 아니다 “심한 정도가 아니에요. 한 여자의 일생이 걸린 문제예요.” “그렇다고 이런 일까지 대통령이 나서서 간 섭할 순 없잖아.” 딴은 그랬다. 이런 남녀 간의 사랑놀이까지 일일이 청와대 서 나서고 대통령이 챙기고 영부인이 앞장 선 다면 국정은 언제 돌보고 밑에 직원들은 뭐라 고 수군댈 것인가. 그러나 영부인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기어 코 짚고 넘어갈 태세다. “엄격히 따진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개인적인 일이고 법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겠 죠.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고시에 합격했다면 법관에 임용될 거 아녜요?” “……” “법을 다루고 사회 정의를 가려야 할 법관 이 이런 부도덕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문 제가 있는 거 아녜요?” 거, 듣고 보니 상당히 일리가 있고 짚고 넘 어가야 할 논리가 뚜렷해진다. “편지를 두고 갈 테니 직접 판단해서 처리 하셨으면 좋겠어요.” “……” 영부인이 물러간 후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통령은 법무장관을 호출, 동백아가씨 의 사연을 설명한 후 먼저 ‘갑돌이’의 신상 명세를 확인받았다. “음, 확실하군… 그래 신장관은 이 일을 어 떻게 생각해요?” “법관 임용 말씀입니까?” “국민의 권리를 보호해 줘야 할 법관 자격 으로선 좀 곤란하잖겠느냐는 게 내자의 생각 이오.” 각하는 입장 곤란할 때 꼭 ‘내자’를 끌어 들여 핑계대는데 그건 ‘이 문제에 지금 안식 구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상대방에 게 간접 전달, 무언의 압력을 넣는 각하의 노 하우다. “물론 한때 젊은 혈기로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나 한 사람의 무책임한 실 수로 한 여자가 일생을 눈물과 한으로 지낸다 고 생각해 봐요.” 게다가 각하는 영부인이 했던 얘기를 그대로 리바이벌하고 있는데, “고시패스 했다면 국가로서도 그냥 사장시 키기엔 아까운 인재요. 굳이 법관이 아니더라 도 다른 길이 있잖소. 변호사라던가…” 잘못은 묻되 공직에 등용시키지는 말라는 당 부였다. “변호사로서 자신과 같은 경우를 맡아 변론 을 하다 보면 느끼는 바도 있을 테구…” 감 잡은 법무장관의 답변이 전선을 타고 흘 러나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각하.” 법관의 꿈에 부풀어 있던 ‘갑돌이’는 한때 의 실수를 가혹하게 보상해야만 했는데, 운명 의 장난은 실로 묘했다. 각하가 서거한 이듬해 80년, 10?6사태의 재 판정에 그의 변호인 자격으로 서 있었다. 혁명하게 돈 좀 줘 ‘나공신(羅功臣)’이란 사람이 있었다. 물론 가명이다. 그러나 ‘공신’이란 이름의 뜻글자에 주의 해 주기 바란다. 부산의 자그마한 군납업체 월급쟁이인 그의 공식 직함은 전무이사… 나 전무가 몸담고 있 는 ‘S군납 회사’란 게 그랬다. 요즘처럼 공장 돌려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입찰보고 대규모 납품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너댓 평짜리 사무실 하나에 짐 싣는 트럭 몇 대, 시장 훑고 다니는 사람 몇 명만 있음 군 납업체로 행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게 짭짤했다. 윗대가리 부대장, 참모장만 잘 구어 삶아 OK 떨어지면 그날로 시장가서 납품할 물건 후려치고 싸게 사서 웃돈 얹어 갖다 디밀기만 하면 결재가 떨어지는 노가 터지는 장사였는 데, 이 노가 터지는 장사의 흥망성쇠는 부대 장이나 윗대가리 참모에게 달려 있었고 S회 사의 주 납품처는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 부’였다. 1960년 1월…, 작년 9월에 할퀴고 간 사라호 태풍의 잔해가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앙상한 몰골로 아픈 기 억을 되새김질시키고 있었다. 924명이 실종되고 사망했던 건국 이래 최대 의 재난이었다. 게다가 3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로 정국까지 어수선하던 그해 세모, 나전무의 ‘S군납회 사’에 초비상이 걸렸다. 주 거래처인 군수기지사령부의 사령관이 바 뀌었단다. 혁명하게 돈 좀 줘--^ 이놈의 장사를 하다보면 제일 골치아픈 게 부대장 바뀌는 일이다. 이제까지 술 퍼먹이고 뒷돈 바쳐 길 닦아 놓 은 게 말짱 도루묵으로 변하고 다시 찾아 뵙 고 로비를 해야 되는데, 문제는 새로 온 부대장이 고분고분 먹혀드느 냐 안먹혀드느냐에 관건이 달린 거라. 이 때 문에 새 사령관이 부임해 오면 즉각 ‘지피지 기면 백전백승’이란 손자병법에 입각, 새 사 령관의 신상명세에서부터 사령관은 물론 그 사모님의 취향까지 방대한 자료 수집에 들어 가는 게 이 바닥의 상식이었는데 안좋은 소식 이 들려왔다. 군수기지사령부엔 중앙에 빽줄 있는 참모들 몇 명이 사령부를 온통 휘어잡고 있었다. 사령관도 함부로 못하는 막강한 친구들이었 다. 나전무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그 친구들을 새로 온 사령관이 단칼에 날려 버렸단다. 후방에서 잘 나가다 하루아침에 최전방으로 곤두박질쳤다는 얘긴데 낙화암 절벽 같은 첫 소식에 이어 나발론 요새 같은 난공불락의 소 스도 들어왔다. 어느 사단장 시절, 서울서 박사단장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단다. 겉봉에 찍힌 국회문장이 선명한 걸로 봐 어 느 의원님의 일필휘지였던가 본데 그 지역 자 유당 국회의원이 군납 관계로 자기 동생을 부 탁하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자유당 국회의원이면 날고 기는 건 물론, 지역에 떴다 하면 기관장부터 군부대 부대장까지 역 플랫폼에 달려나가 줄줄이 사 탕으로 늘어서는 게 관례화되어 있던 시절이 었다. 부관은 편지를 읽는 박정희 사단장의 표정이 약간 실룩거린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튿날…, 형님 의원의 부탁도 있었 고 해서 의원님의 동생 되는 친구가 느긋하게 박사단장을 찾아갔는데, 부관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짜고짜 조인트를 까는 거 있지? 뭐 이런 사단장이 다 있어…? 민간인을 부대 졸병마냥 두들겨 까는 법이 어디 있나 그래. “네 형님이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이지 너 까지 국회의원이야?” 돌연한 사태에 당황한 건 오히려 안내했던 부관이었다. “각하, 이러시면 안됩니다.” 별만 달면 ‘각하’로 호칭되던 시절이었다. “놔, 이런 놈들 때문에 군까지 썩어들고 있 어. 국민 방위군 사건이 왜 생겼는지 알아? 바로 너거 형 같은 인사들 때문에 수많은 장 병들이 추위에 얼어 죽은 거란 말야! 알아?”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게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눈보라 치는 1·4후퇴 때 군 장병들에게 지급할 모포와 의류 따위를 윗 대가리 몇 분이 골고루 나눠 먹고 내려 보내 지 않아 천 명에 가까운 장병들이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사건이었다. 박사단장은 지금 그걸 형 ‘빽’ 믿고 한건 하러 찾아온 친구에게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 다. 설명이 순리적이지 못하고 다소 난폭했던 게 흠이었다. 정강이를 절룩거리며 집구석에 돌아온 의원 님 동생께서 서울 계신 형님한테 고변을 했 다. “아주 악질같은 놈이에요, 전 괜찮습니다. 까짓 조인트 몇 방 까인 거 잊을 수도 있어 요. 그러나 이건 형님을 무시한 거 아닙니까? 소문 나봐요. 형님 체면이 뭐가 됩니까?” 조인트 까인 자기는 괜찮은데 형님 체면이 문제란다. 사람을 충동질할 땐 이렇게 해야 먹혀 드는 법인데. 형님되시는 의원님의 이 가는 소리가 전선을 타고 강원도를 진동시켰다. “내 이 자식, 두고 봐라. 그냥 넘어가나. 박 정희랬지?” 그러나…, 그 의원님은 결국 두고 보지 못했 다. 몇 년 후 5·16혁명이 일어나고 그 의원님은 정계에서 영원을 고하게 되는데, 그건 훗날 얘기고…. 보고서를 읽고 있는 나전무와 채( )사장은 앞이 캄캄했다. 도대체 이런 친구를 어떻게 치고 들어가야 잘 치고 들어갔다고 소문 날까…. 회사 사활이 걸린 문제라…. 채사장…, 나전무 회사 사장님 성씨가 ‘채’씨다. 이 채사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전무를 재촉 했다. “어이 나전무, 안되마 사모님 쪽을 파고 들 어가 보는기 어떻겠노?” “글쎄요…” “군바리 수입 빤한 거 아이가, 월급이랬자 겨우 쌀 한두 가마 값밖에 안될 낀데 한뭉테 기 슬쩍 던져 주마 안묵고 배기나. 그쪽으로 파고 들어가 보자.” 그게 글쎄, 잘될랑가 몰라…. 윗대가리를 쑤시려면 먼저 측근부터 건드려 보는 게 순서다. 박사령관의 운전병을 만났다. “이 병장, 박사령관 사모님 어때? 성격이 화통해요?” “군납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냥 사령관님을 찾아가 담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건 아예 처음부터 한수 접고 들어온다. “전에 사단 장병들이 땔감용으로 부대에 있 던 헌 전신주를 하나 사택으로 가져갔다가 혼 쭐이 난 적이 있습니다.” 날샜다. 더 이상 무슨 작전이 필요하겠노? 우직한 친구한테 페인트모션을 쓰면 오히려 역효과만 생긴다. 마침 타이밍이 정초라… 구 정 전야에 명분을 붙인 나전무가 간단한 떡값 을 준비, 다이렉트로 붙어 보자 결심하고 사 령관실을 노크했다. 간단한 인사 치레가 끝나고 별말이 없는 사 령관 앞에서 분위기가 서먹해진 나전무가 용 기를 내어 떡값 봉투를 디밀었는데, “이기 뭐요?” “별 뜻은 없습니다. 인사 치레로 받아 주십 시오, 각하.” 무표정하게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어 내용물 을 확인하는 사령관을 보며 나전무는 속으로 웃기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별난 친구 다 보겠네, 그런 건 사람이 가 고 나서 뜯어 보는 거야, 이 친구야.’ 내용물을 확인한 사령관의 검은 선글라스가 나전무를 향해 일직선을 그었다. “당신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군납해 왔 소?” 이럴 때 뭐라고 답변해야 정답인가. “그, 그게 아니고… 다만…” 식은땀을 흘리는 나전무에게 봉투를 되돌려 준 사령관이 탁자에 식어 있던 찻잔을 권했 다. “나전무라고 했소? 우리 한 가지 협상합시 다.” ‘응,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구나. 장사꾼하고 협상하자는 건 밀고 당기고 흥정하자는 수작 아냐?’ 돌변한 상황에 나전무는 침을 삼키고 분주히 계산을 돌렸다. ‘얼마를 주면 될까? 아니 얼마를 요구하고 나올까… 까짓 요번엔 왕창 던져 줘서 코를 꿰어 버려? 이런 친구들일수록 화끈한 걸 좋 아한다잖아.’ 한창 분주하게 통밥을 굴리는 나전무의 귓전 에 박사령관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까진 어떤 식으로 납품을 해왔는지 상관않겠소.” ‘응, 감 잡았다. 이전 가격으론 안 먹겠다 이거지? 돈이 적었단 얘기 아냐? 그래서 주 는 사람 보는 데서 얼마가 들어 있나 확인한 거구만…’ “이 시간부터 만에 하나 정량 미달 군납품 이 발견되면 당신들을 고발할 거요.” 이기 무슨 소리고…? 살벌하구료. 그러니 어쩌란 얘긴가, 표정을 보아하니 겁 을 줘서 값을 올리자는 것 같진 않다. “정석대로 하시오. 나는 물론이고 참모들 누구한테도 양말 한짝 선물해서도 안 돼요.” 또박또박 살자는 얘기 같은데 어쨌거나 잘리 지 않는 건 분명했다. 부대를 나오는 나전무는 그러나 헷갈렸다. 도대체 속셈을 알 수가 없는 게, 막말로 요 즘 세상에 돈 안 먹는 장군이 어디 있나? 나전무가 알기론 그랬고, 그래 왔었고, 앞으 로도 그럴 게 뻔했다. 아무래도 사령관의 인간성을 좀더 파악할 필 요가 있다 해서 나전무 잘가는 ‘조방’옆 고 래고기 횟집으로 사령관 부관을 모셔 놓고 슬 쩍슬쩍 넘겨짚기로 사령관의 사생활을 집중 인터뷰했다. “우리끼리 얘긴데 안할 말로 소장 봉급 얼 마요? 자기만 안 먹는다고 세상이 밝아져? 요즘 세상에 안 먹는 게 등신 아뇨?” 자리가 어색한 듯 줄곧 입에 지퍼 채우고 있 던 부관이 소주 몇 잔에 취기를 얻자 지퍼를 풀고 말문을 열었다. “박정희란 장군을 아직 모르시는군요.” “잘 모른다기보다, 서로 편하게 사는 게 좋 지 않느냐 이거지.” “아마 7사단장으로 계실 때였을겁니다.” ‘응 그래, 이제 슬슬 터지는구나…’ 편의상 부관의 설명을 작가가 대신하겠다. 별 달고도 한참을 사글세방으로 전전하는 사 단장을 딱하게 여긴 참모들이 주머닐 털었단 다. 작지만 집 한칸 마련해 주자는 충성심의 발로에서 사단장 몰래 집칸을 마련, 사모님을 설득시켜 이사를 마쳤는데, 그 이튿날 새벽 사단참모들에게 CPX가 떨어졌다. 창군 이래 처음 사병들은 잠재우고 참모들만 비상걸린 거 있지? “뭐야, 왜 그래?” “위에서 쳐들어왔대?” “그런데 사병들은 왜 안 깨워?” “쉬잇, 사단장 떴어.” 영문도 모르고 자다가 달려나와 완전군장을 하고 늘어선 참모들 앞에 달빛의 실루엣을 그 리며 나타난 사단장은 느닷없이 노성을 터뜨 렸다. “어느 놈이야? 빨리 나오지 못해?” 이런 제기, 꼭두새벽에 영문도 알리지 않고 소집하고선 다짜고짜 “어느 놈이냐, 빨리 나 와라’라니… 내용을 알아야 빨리 나가든 늦 게 나가든 할 거 아닌가? 사단장의 두 번째 호통이 터져나왔다. “누가 그따위 주제넘은 짓 하랬어, 주모자 가 누구야?” 줄기차게 헷갈리는 거 있지? 궁금증을 견디다 못한 작전참모가 대표 주자 로 나섰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각하.” “누가 제군들보고 집 사 달랬어? 그렇게들 할 일들이 없나?” 아하… 감 잡았다. 엊그제 주머니 털어 사모님께 집 사준 거 얘 기구나. 그런데 그게 어째서 꼭두새벽에 CPX 걸고 난리법석인가 그래? 좌우단간, 날이 밝자 참모들은 복덕방으로 쏟아져 나가 어제 산 집을 하루만에 되팔아야 하는 전무후무한 임무수행에 들어갔다. “부탁합니다, 영감님. 이거 오늘 중으로 못 팔면 우린 사단장한테 작살나요.” “글쎄… 급히 파는 집이라 제 값 받을랑가 몰라.” 지금 제 값이 문젠가? 자칫하다간 집 팔리는 그날까지 새벽 비상이 이어질 상황인데, 하느 님이 보우하사 가까스로 임자를 만나 산 값의 절반도 안되는 헐값에 넘긴 후 어제 온종일 땀을 쏟으며 옮겼던 사단장댁 이삿짐을 다시 사글세 집으로 빽튜더… 원위치시키는 참모들 은 저켠에서 이불 보퉁이를 싸는 사모님께 한 없이 송구스러워해야 했다. 장난도 아니고 무슨 꼴인가, 그래. 엊그젠 영문도 모르고 좋아하며 짐을 꾸리다 가 오늘 또 다시 이불 보퉁이를 싸는 모습이 왠지 허탈해 보였다. 그러나 사모님은 미안해 하는 참모들을 보며 되려 미안해 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고마운 성의들을 받아들 이지 못해서 말예요.” 이삿짐 보퉁이를 둘러멘 참모들이 땀을 닦으 며 멋쩍게 웃었다. “사단장님 원래 그런 분 아닙니까, 우리가 잘못했죠. 하하핫…” 부관의 얘기를 듣고 있는 나전무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갔다. 목하… 가벼운 쇼크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부관과 헤어져 밤길을 걸어가는 나전무의 뇌 리에 무언지 모를 찡한 감정이 낮에 본 박정 희 사령관의 선글라스 낀 얼굴과 오버랩되며 종래 떠나질 않고 쳇바퀴 돌고 있었다. 뭐랄까… 왜, 영화 보고 나오면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한동안 반추되는 거 있지? 바로 그런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 겠다. 그저 새로 취임한 객기려니 생각했는데, 단 가 올리려는 고단수쯤으로 치부했었는데, 이 거, 완전히 ‘선천성 구제불능 환자’ 아닌 가…? 부대 밖은 골목마다 전신주마다 정, 부통령 선거 포스터로 도배질되어 있었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갈아 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너절한 선거 구호와 함께 들리는 소문에 의 하면 자유당에선 아예 득표율을 85%로 정해 놓았단다. 웃기는 친구들이다. 국민이 도장 찍는 득표율을 자기네들 멋대로 정하고 말고 해?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민주 적이고 상식적이질 못했다. 그 웃기는 친구들 이 권력의 핸들을 움켜쥐고 상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박사령관이 부임 직후, 빽줄 믿고 설치던 것 들 청소하면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친구가 하 나 남아 있었다. 너무 막강한 빽줄을 업고 있어 사령관으로서 도 속수무책인 대령 계급이었다. 이 친구에게 있어 투스타 사령관 정도는 눈 아래 노니는 금붕어 새끼였다. 중앙에 띄우는 보고서 한 장으로 먹이를 줄 수도, 날려 버릴 수도 있는 파워가 견장에 붙 은 대령 계급장보다 더한 무게로 실려 있었 다. 선거철만 되면 여당 표밭 관리에 정신없이 들고 뛰는 정치 군인이기도 했는데… 이 친구께서 오늘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사 령관실에 들이닥쳤다. “각하, 이젠 고집 그만 부리시고 협조 좀 해주십시오. 제 체면도 생각해 주셔야죠.” 대령 체면이 얼마나 되는진 모르지만 아무려 면 별 두 개 체면만이야 할까만 이 친구에겐 그럴 만한 쌓인 감정이 있었다. 한번쯤 사령부 예하 부대장들을 모아 놓고 사령관이 술 한잔 사주며 자유당이 왜 집권해 야만 되는가, 야당이 집권하면 왜 안 되는가 를 설명해 달라고 수차례 얘기했었다. 막말로 자기 보고 술값을 내래나, 브리핑 자료를 직 접 작성하래나… 그냥 몸만 나가서 달린 입으 로 한마디만 해주면 자기 좋고 내 좋고 집권 자유당 기뻐하고, 그게 인연이 되어 선거 끝 나면 쓰리스타로 진급시켜 줄지 또 아나…? 그걸 몇 번이나 개인적으로 부탁도 했고 중 앙 지시사항임을 숙지시키며 전달했는데도 돌 부처 마냥 꿈쩍도 않는 거 있지?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령관이었다. 지금도 그런 게, 선거가 내일모레라 발등에 불똥이 떨어져 오줌 × 가리고 뒷도자기를 흔 들며 들고 뛰다 달려와 이렇게 사정하는데도 담배만 피워 물고 인상만 그려 대고 있잖은 가. 더럽고 아니꼽다는 제스츄어란 걸 대통령이 모를 리 있냐만 일단 달래고 보자는 절박한 심정에 대령이 한 가지 절충안을 제시했다. “정 거북하시면 예하 부대장들은 제가 소집 하겠습니다. 제가 설명할 동안 자리만 지켜 주십시오.” 순간, 사령관이 고개를 들고 대령을 쳐다… 아니 노려봤다. “○대령. 당신, 군인이야 정치인이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사령관의 눈에서 불 빛이 번쩍였다. 대령은 자신도 모르게 부동자 세를 취하며 사령관을 응시했다. “난 그런 짓 못해, 아니 안해! 하려거든 후 보들이 내려와서 부대장들 모아 놓고 직접 하 라구 해, 미친놈들 같으니…!” 아니 이 친구가… 지금 누구 보고 내려와라 마라, 미친놈 운운 하고 있어? 후보들이라면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시고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이기붕 부통령 출마자 아니신가? 그 고귀하고 막강하고 하늘 같으신 분들을 단칼에 미친놈으로 매도해? 이 거, 완전히 또라이 아냐?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고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이거 나… 이거 안 되겠다…, 정신 교육부터 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 대령이 미처 모션을 취하 기도 전, 사령관이 책상 앞으로 성큼 걸어가 자신에게 배당된 투표 용지를 집어 북북 찢은 후 미련없이 석유 스토브 뚜껑을 열고 집어 넣어 버렸다. 사령관의 돈키호테 증세가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 줄 대령은 미처 몰랐다. 이건 정신 교육 정도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 라고 판단한 대령이 입다물고 두고 보자는 다 짐을 수십번 되뇌며 사령관실을 박차고 나왔 다. 그 사연을 소주잔을 들이키며 부관의 입을 통해 듣고 있는 나전무는 어제 먹은 곰장어 구이로 아침까지 막혀 있던 소화기관이 뻥 뚫 리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전무는 ‘인간 박정희’ 에게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흠뻑 빠져들어 훗 날,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 게 되는데… 마음이 통하면 친구가 될 수 있 다. 나전무의 호기심이 애정으로 변색되면서 그 애정이 텔레파시로 박사령관에게 전달됐 고, 두 사람은 가끔씩 술잔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상황을 아래위턱이 분리되도록 환희에 젖 어 즐기는 분이 계셨다. 나전무 회사 ‘오너’되시는 채사장님…, 훗 날 국내 굴지 재벌그룹 창업주 되시는 분이 다. 이제껏 실명을 거론치 못하고 ‘채사장’, ‘채사장’만 남발했던 작가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해 주는 줄 알고 넘어 가겠다. 넘어가는 데…, 두고 보자고 수십번 다짐했던 실세 대 령의 보고서가 효력을 발휘했음인가, 박정희 사령관은 선거가 끝난 후 여기 저기 떠돌다 별 볼일 없는 한직인 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 로 정착해 있었다. 당연히 나전무와의 유대 관계도 중단될 수밖 에 없었다. 함께 헤매던 항도 부산의 추억만 더듬던 나 전무에게 어느 날 박사령관의 전화가 걸려 왔 다. “어이, 나전무. 술 한잔 사!” 2군 부사령관으로 밀려난 후 처음 듣는 박장 군의 목소리였다.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그 음성이 나전무에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 다. 동헌에 앉아 춘향을 부르는 암행어사 이 몽룡의 옥음이었다. “네, 사령관님. 저녁에 어디로 나갈까요?” “아냐, 지금 나와. 지금 나올 수 있지?” “아니…, 이 대낮에 말입니까?” “어디 조용한데 없어? 왜 없어? 사방에 널 린 게 조용한 술집 아닌가.” 나전무는 모처럼 여덟 폭 매화병풍이 둘러쳐 진 방석집으로 박장군을 안내했다. 그런데 어째 모처럼 만난 사령관의 표정이 밝지가 못하다. “사방에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 몇 잔 술을 비운 사령관이 내뱉는 첫마디였 다. “자유당 없어지니 이젠 신파, 구파로 뜯어 먹고 있어.” “…” “말 구루마, 소 구루마까지 동원시켜 정당 정치를 하고 있어. 그게 민의래. 미친놈들, 사 방천지가 데모부대야.” 다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박장군이 나전 무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나전무, 군대 후생사업이란 거 알고 있 나?” 이 양반, 아무래도 오늘 뭔가 알맹이 있는 내용을 풀고 온 것 같다. “위에 앉아 사병들 부식비, 군량미, 휘발유 까지 빼 먹고도 모자라 사병들을 산에 올려 보내 숯까지 구워 팔게 하고 있어. 그게 후생 사업이야.” 그거야 뭐, 천하가 알고 있는 공지사항 아닌 가… 그걸 새삼 끄집어 내는 저의가 궁금한데… “사병들 잘 부르는 노래가 있어. ‘소장, 중 장, 대장은 휘발유 도둑놈…, 소령, 중령, 대령 은 부식 도둑놈…, 하사, 중사, 상사는 건빵 도둑놈…’” 저의를 모르는 나전무는 술잔만 들이킬 수밖 에 없었다. “멀건 국물에 콩나물 몇 개 띄운 게 ‘도레 미탕’, 시래기 잎사귀 몇 장에 쇠기름 띄우 면 ‘우족 도강탕’… 소가 장화 신고 강을 건넜단 얘기야.” 심각한 군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거론하시는 모양인데 본론은 안 치고 바람을 너무 잡는 다. “위에서 다 떼 처먹으니 사병들한테 돌아가 는 게 없어. 정권 바뀌어도 달라진 게 없다 구.” 옆에 앉았던 한복 아가씨가 슬쩍 사복 입은 박장군을 곁눈질했다. 오가는 내용으로 보아 별자리 같은데 무슨 놈의 불만이 그렇게 많은 가 그래. “4·19 혁명 때 이기붕 집앞에 출동한 중대 가 있었대. 중대장이 김 무슨 대위였지, 아 마…” 얘기가 천방지축, 감 잡기 힘들 정도로 중구 난방으로 들고뛴다. 군 후생사업에서 느닷없 이 핸들을 꺾어 4·19 진압부대 중대장으로 U턴을 하는데, “몽둥이를 든 데모대는 살기를 띠고 몰려드 는데 위에선 아무런 지시사항이 없더래.” 술잔을 기울이며 뜸을 들이는 박장군의 얘기 들 다 듣다간 날 새겠다. 작가가 대신 요약해 서 정리하겠다. 데모대는 노도처럼 밀려오는데 위에서는 아 무런 지시가 없었다. 발포를 하라든가, 아니면 철수를 하라든가 명령이 있어야 움직일 거 아 닌가. 이기붕의 집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고 출동한 중대장은 무전기에 대고 사단장에게 다급히 보고했다. “데모대가 부통령 관저로 몰려옵니다. 어떻 게 할까요?” 그런데 사단장께선 그렇게 다급하지도 분명 하지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알았어. 사령관님께 보고해 볼 테니 기다 려 봐.” 중대장과의 통화를 잠시 끊은 사단장이 사령 관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발포 명령을 내릴까요. 사 령관 각하?” 사령관의 응답이 또 뜻뜨미지근했다. “거, 뭐… 사단장이 알아서 해요.” 나중에 책임질 일은 빠지시겠다는 얘기신데, 책임지기 싫은 거야 사단장도 이하 동문이라. 다시 걸려 온 중대장의 재촉에 사단장도 같 은 말을 리바이벌시켰다. “거, 중대장이 상황 판단을 해서 적당히 알 아서 해!” 이 중차대한 상황을 말단 중대장 보고 알아 서 처리하라니… 전쟁중의 다급한 상황이라면 중대장의 상황 판단이 우선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부모형제들에게 총부 리를 겨누고 있는 정치적인 상황이다. 빠져나 가려는 속셈을 간파한 중대장이 열받아 무전 기에 대고 사단장에게 욕을 쳐버렸는데‥ “야, 이 자식아! 적당히 알아서 하라는 게 대체 뭐야?” 사단장이 황당해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 나? 밥풀 세 개가 감히 별자리에게 욕을 치다 니… 난생 처음 당하는 황당한 상황에 멍청히 무전기를 들고 있는 사단장의 귓전에 분노에 찬 중대장의 고함 소리가 또 한번 후려치고 꽂혔다. “윗대가리 앉아 하는 일이 뭐야? 이 자식 아! 그러라고 별 달아 줬어? 좋아, 그렇게 뒤 가 무서우면 내가 알아서 할께!” 엄청난 하극상을 감행한 중대장은 이기붕의 집앞에 주둔했던 병력을 철수시켜 버렸고 그 로 인해 독재에 항거한 민의의 함성을 승리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게 했다. 역사의 그늘에 가리워진 한 이름 없는 중대 장의 용기있는 결단은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후 실로 엉뚱한 영웅 하나를 탄생시켰다. 그때 부하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어물쩡거렸 던 사령관이 ‘데모대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 지 않은 용기있는 장성’으로 둔갑, 국민적 추앙을 받게 되는데, 이 사람이 누군지는 굳 이 밝히려 들지 말자. 지난 역사다. 4·19 혁명의 완성과 함께 ‘허정’내각이 출범한 직후…, 부하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던 문제의 사단장이 하극상의 주인공인 중대장을 불러 올렸다. 해놓은 짓이 있어 영창 갈 각오를 다지며 사 단장 앞에 부동자세를 취한 중대장에게 사단 장이 의외의 미소를 뿌리며 다가섰다. “지난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네. 군인이라 면 그 정도 기상은 있어야겠지, 핫핫핫…” 이 무슨 귀신 팥죽 떠먹는 소린가…?” 평소 중대장이 알고 있는 사단장의 포용력과 는 정 반대다. 자신의 권위에 먹칠하는 부하 장병에게 있어서는 자그마한 실수 한점 용납 하지 않던 사단장이었다. 그런데 지난 일을 잊기로 했다니‥? 얘가 언 제부터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김포평야만치 넓어졌나, 그래. “어떤가, 내 상부에 자네 표창과 진급을 상 신할까 하는데…” 자신의 무능과 비굴함이 탄로날까 봐 미리 입막음으로 초를 치겠다는 얘기다. 순간, 젊은 중대장은 오장육부를 뒤틀고 목 구멍까지 쳐올라오는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그리고 사단장을 응시하며 또렷하게 복명했 다. “한가지 간청이 있습니다, 각하.” “응, 그래 뭐든 말해 보게. 내 즉각 품신하 겠네.” “저는 감히 상관에게 욕을 한 부하로서 이 미 군에 있을 자격을 상실한 군인입니다.” 사단장의 표정이 묘하게 움직였다. “이등병으로 강등, 전역시켜 줄 것을 요청 합니다.” 여기까지의 얘기를 마친 박장군이 다시 술잔 을 채웠다. 결과가 궁금해진 나전무가 박장군 을 응시하며 여쭤 봤다. “그래서 그 중대장은 전역 처리가 됐습니 까?” “위에서도 바라던 일 아닌가, 이등병은 아 니지만 예편시켰어.” 박장군이 의식적으로 옆에 앉은 아가씨를 돌 아 보며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보냈다. “그때 그 사단장이 누군지 아나?” 그걸 알면 이제까지의 스토리도 알게? “지금 바뀐 내각에서 장관하고 있어. 사령 관과 함께 시민들에게 발포 명령을 하지 않았 다는 공로로 그 자리에 앉았다는구만, 허허 허.” 약간은 시니컬한 마른 웃음을 간단히 뿌린 박장군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옆에 앉은 아가 씨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임자들, 잠시 자리 좀 비켜. 우리 둘이 중 요한 얘기할 게 있어.” 아가씨들이 방을 나가고도 한참을 술잔만 들 이키며 뜸을 들이기 수십분… 문득 정색을 하고 나전무를 불렀다. “이봐, 나전무.” “네, 각하…” 박장군의 눈에는 이제까지 마신 술기가 어디 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 혁명할 거야, 돈 좀 줘!”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나? 혁명 을 하겠다니…? 나라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하 겠다는 얘기 아닌가? “……”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나전무의 표정과는 달리 박장군의 눈빛은 거울 같이 또 렷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그리고 약 1분여 뒤, 채사장의 안구에 핏발 이 서고 안면근육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 다. 제 집이야 잡혀 먹건 비벼 먹건 상관할 바 아니다. 회사채를 지가 뭔데 마음대로 잡혀 먹어? 망할 자식 같으니…! 즉각 사무실 및, 외근직원들에게 채사장의 긴급 명령이 하달되며 나전무에 대한 지명 수 배령(?)이 떨어졌는데, 돈보다 더 채사장을 다 급하게 조여드는 사연이 있었다. 며칠 전에 들은 얘기가 있잖은가, 혁명거사 자금 건. 십중팔구 그 엄청난 돈이 박정흰가 뭔가 하 는 그 작달막하고 새카만 친구의 역적모의 자 금으로 흘러 들어갔을 게 불문가지라. 아…, 이 망할 놈의 나전무가 기어코 사고 치는구나. 이제 집구석 망하고 회사 말아먹고 신세 조질 일만 남겨 둔 터… 우선 나전무를 잡아다 대령하는 게 급선문데 어디 쳐박혀 몸 뚱일 꼬불치고 있는지 온종일 코빼기도 못 찾 겠는거 있지? 애타는 심정으로 동백아가씨의 빨갛게 멍든 가슴을 되씹으며 울분을 다스리 는 채사장의 집에 나전무가 모습을 나타낸 건 삼라만상이 깊이 잠든 야밤이었다. 다짜고짜 채사장의 두 주먹이 나전무의 멱살 을 움켜 잡았다. “이 자식, 네가 뭔데 회사채를 저당 잡혀? 그 돈 어떡했어? 당장 내놔.” 그런데 나전무의 모션이 아주 당당한 거 있 지? “갚겠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당당하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긴데, “뭐? 시간을 달라? 그럼 그 돈은…?” “그렇습니다. 이미 제겐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좀 주십시오.” “오냐 그래, 법대로 하라 이거지? 좋아, 그 돈이 어디로 건너갔는지 한번 터뜨려 봐?” 험악한 분위기에 잠자다 나온 채사장 사모님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여보,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를 나 눠 봐요.” 일단 얘기를 들어 보고 나서 차후 처리 방법 을 강구하기로 작정, 흥분을 가라앉힌 채사장 과 나전무가 협상을 했다. <1년 동안 나전무의 봉급을 동결한다. 그리 고 1년 안에 돈을 반드시 갚는다. 단, 그 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나전무만 알고 채사장은 일체 모른다…> 방방 뛰던 낮의 채사장이 이렇듯 쉽게 허물 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달리 있었다. 말이 사장이지 군납의 ‘군’자도 모르는 처 지였다. 로비고 입찰이고 죄 나전무 노하우 하나로 움직이는 회사였다. 그러니 1년 약속 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딱하디 딱한 상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었음인데, 회사채가 저당잡힌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면서 채사장의 조바심이 자꾸만 날개짓 했다. 봉급 동결이랬자 1년 죽도록 모아 봐야 원금 의 꼬리도 못깐다. 그렇다고 1년 후에 확실하 게 갚는다는 보장도 없다. 집어 넣자니 그렇 고 그냥 두자니 은행 빚이 조여 오고…, 전전 긍긍, 사장실에 홀로 앉아 깊이 시름하는 차 에 은행에서 치고 나왔다. “우리 은행에서 법적 조치를 취하겠습니 다.” 사장도 모르고 나전무는 돈 빼갔고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나전무를 사기나 횡령 으로 집어 넣겠단 최후 통첩인데 난처해진 건 사장 쪽이었다. “이, 이거 보십시오.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 게 냉정하게…” “그럼 사장님께서 정식 서류로 절차를 밟아 제출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순 없지…, 돈이 어디 한두 푼이래야 선심을 쓰던가 말던가 할 거 아닌가. 그거 도 장 찍어 뒤집어 썼다간 회사가 날아갈 판인 데? 분주히 통밥을 짚는 채사장에게 은행이 결심 을 재촉했다. “한 달 이자만도 매달 얼만지 알고 계시 죠?” 드디어 채사장의 통밥이 가닥을 잡았다. “알겠소, 그럼 이쪽에서도 법적 조치를 병 행해야겠군요.” 까짓,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댔다. 나전무 없 다고 잘 굴러가는 회사가 하루 아침에 문닫을 까. 은행과 채사장의 긴급 통화가 창공을 분주히 오가면서 나전무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 다. 양수겸장에 몰린 ‘졸’ 신세를 지나 내일부 터 법정대학 노고지리통 속에 갇혀 열심히 가 다밥을 씹어야만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 나 전무는 홀로 용두산 공원 뒷자락 계곡 틈에 앉아 아침부터 막소주를 까고 있었다. 노고지리 통이건 종달새 우짖는 새장이건 이 미 각오했다. 문제는 검찰에서 물고 늘어질 돈의 행방이다. 만에 하나 잘못되어 박소장까지 추적되면 혁 명거사가 밝혀지고 몇 사람의 목숨을 하루 아 침에 어느 귀신이 데려갈지 모를 일, 무슨 일 이 있어도 나전무 선에서 끝을 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박소장에게 귀뜸이라도 해주는 게 좋을 거 같아 공원을 내려와 2군 사령부로 다 이얼을 돌렸는데, “참모장 이○일입니다. 누구시라고요?” 박소장은 자리에 없었다. “부산 S상사의 나전무라고 말씀드리면 아 십니다. 긴급한 일로 꼭 좀 통화를 했으면 합 니다.” “나전무라고 하셨죠? 박소장님은 지금 중요 한 일로 여기에 안 계십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전무가 수화기에 대고 고 함을 쳤다. “말했잖소. 매우 다급하고 중대한 일이라고 요.!” 그런데 저쪽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 었다. “내일이면 그분의 소식을 알게 될 겁니 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일이면 그분의 소 식을 알게 된다니…? 공중전화 옆 구멍가게에는 1961년 5월15일자 일력이 초여름의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었 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S상사 채사장은 무겁고 짐진 마음으로 새아침을 맞고 있었다. 어쨌건 창업부터 회사를 키워온 나전무였다. 미운 정 고운 정이 흠뻑 든 그 친구를 잡아 넣어야 하 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이제 오늘부터 스스로 회사를 꾸려 나가야 하는 짐진 마음으로 잠자 리를 뒤척이다 겨우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상 앞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습관 적으로 트랜지스터를 켰는데 아나운서가 이상 한 소릴 반복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 자중하 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 를 조직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홍두깨 떡치는 소리고? 그렇잖아 도 할 일이 태산인데 혁명이라니…? 불현듯 나전무와 박소장의 얼굴이 스치고 지 나갔다. 군대 일이라면 채사장도 빨리 상황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 명색이 군납으로 먹고 사는 처지 아닌가. 군에 변화가 있었다면 응당 그 에 상응한 작전을 세워야 할 터, 군 소식에 정통한 친구를 찾아갔다. “대체 어떻게 된거야?” “세상이 뒤집혀진 거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이 친구야.” 그제서야 채사장은 세상이 변했다는 걸 스스 로 실감했다. 친구가 정색을 하고 쳐다봤다. “그나저나 자네 회사에 나전무라고 아직 있 나?” “응, 그 친군 왜?” “아, 이런 멍청한 사람 봤나, 아니 그래, 옥 을 옆에 두고도 몰라?” 옥이라니, 사장 몰래 회사채 저당 잡히고 그 놈의 혁명자금인가 뭔… 순간, 채사장의 등골 을 전류처럼 타고 찌르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그 친구가 진짜…! “이 친구야, 혁명 실세가 나전무하고 친하 다는 그 박정희 소장이래.” “……!” 몽롱한 정신을 수습하고 대문을 나서는 채사 장의 뒤에서 친구가 친절히 일러 주었다. “바람 잘 타게, 나전무를 잘 활용하란 얘기 야, 이 친구.” 맙소사…, 그 거사자금이 기어코…! 세상을 뒤집어 놓은 그 거룩한 자금을 횡령 이니 사기니 뒤집어 씌워 나전무를 오늘 집어 넣으려고 했었잖은가… 지나온 수십년 성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채사장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회사 가 아닌 집으로 옮겨 놓고 있던 그 시각… 나 전무는 회사 화장실에서 홀로 한없이 울고 있 었다. 오늘은 잡혀 가는 날. 깨끗이 책상 정리나 하자고 아침 일찍 회사 로 달려와 짐정리를 하다가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혁명포고문을 들었다.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나 라디오 앞에 웅크리 고 귀를 기울였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임을 느끼는 순간 무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가 슴을 치밀고 올라왔다. 어디서건 마음껏 울고 싶었다. 그래서 화장실로 달려온 거다. “각하, 기어이… 기어이 성공하셨군요…!” 사나이의 눈물을 마음껏 쏟아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 사합니다!” 그랬었다… 고맙게도 박소장은 혁명을 성공 시켰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상황을 역전시켜 나전무를 도와주었다. 정말 세상이 바뀌었다. 연이어 쏟아지는 혁명 정부의 시책들로 정국 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늘에 숨겨져 있던 박정희란 이름이 시간이 흐를수록 부각 되면서 국민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나 전무를 대하는 채사장과 은행의 모션이 엄청 달라졌다. 사문서 위조다, 공금횡령이다, 하는 건 이미 흘러간 옛 뽕짝에 불과했다. 혁명총수하고 형, 동생 하시는 분을 그따위 이유로 잡아 넣으면 쓰나. 게다가 짐작컨대 그 돈이 혁명을 성공 시킨 뒷자금으로 쓰였음이 분명한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전무는 혁명 공신 중 의 공신 아닌가. 우선, 은행대출금을 채사장이 떠안는 형식을 밟았다. 그러고도 채사장은 저 질러 놓은 죄가 있어 전전긍긍 나전무의 처분 만 기다리며 눈치를 살펴야 했다. 막말로 형 님 되시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각하께 그 간의 상황을 일러 바치기라도 한다면 채사장 의 일신이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다. 시간이 흘렀다. 어수선하던 혁명정국도 안정을 되찾 아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았고 나전무가 오늘도 애타게 기다리는 박정희 각하께선 엄청난 거 인의 모습으로 화면에서나 뵈올 수 있는데, 어쩐 일인가… 각하께선 한 번도 나전무를 불 러 주지 않았다. 이제는 한 번쯤 불러 주실 만도 한데… 금방이라도 회사 현관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앞뒤 경호차에 둘러싸인 각하께서 차를 타고 들어와 그 시니컬했던 미소로 나전무를 부둥 켜안아 줄 것만 같은 환상이 창문을 향한 나 전무의 시야를 뒤덮고 있었는데 그 환상을 두 들겨 부순 고함 소리가 있었다. “대체 어쩔거요?” 요즘 와서 부쩍 태도가 달라진 채사장의 노 기 띤 목소리였다. “날 보구 무작정 손해 보란 얘긴 아니겠 지?” 지켜보니 각하도 안 찾아오고… 뭐, 날샜다 는 얘기다. 별거 아닌 걸 괜히 사시나무 떨듯 불안해 했던 게 후회막급했다는 얘기도 되는 데… “우선 제 퇴직금과 월급을 압류해 주십시 오.” “그럼 그 나머진 어떡하구?” 가히 평온하지 못한 표정을 그리며 담배를 피워 물고 쳐다보는 채사장의 등뒤에서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에서 사무실 아 가씨의 갈팡질팡하는 목소리가 울려 왔다. “사, 사장님, 처 청와대래요… 사장님을 바 꾸라는데요?” 청와대라니…, 순간 나전무는 온몸이 짜릿하 게 저려옴을 느꼈다. 박소장이, 아니 대통령께 서 자신을 찾고 계신 거다…! 그러나 대통령이 찾고 있는 사람은 채사장이 란다. 허겁지겁 수화기를 황송하게 받쳐 든 채사장의 귓전에 비서실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께서 사장님과 나전무를 만나 보시겠 답니다. 내일 오전 11시 반까지 들어와 주십 시오. 현관에 지시해 놓겠습니다.” 상대방 스케줄은 묻지도 않고 순전히 일방적 인 통고만 하고 끊어 버린다. 그러나 각하가 만나자는데 ‘시간 없다’, ‘다음에 만나자’ 하면 안 된다는 걸 채사장 은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과 함께 잘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 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하나 있었다. 나전 무를 부르는 건 이해가 간다. 아니 응당 불러 주시는 게 상식이다. 자기는 뭣 땜에 오라 가 라 하시느냐 이거다. 사연을 알고 있는 나전 무야 감개가 무량했지만 과거가 있는 채사장 으로서는 그게 아니다. 과거가 어디 한둘인가… 거사자금 요청을 일 언지하에 거절했었던 거 하며, 그 혁명자금을 비밀리에 마련해 준 나전무를 사기 횡령으로 집어넣으려 했던 실책에 월급까지 압류시켜 역적취급한 게 누군가…? 그렇게 상반된 심정으로 난생 처음 대통령 사시는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대통령은 환히 웃으며 현관까지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환담도 나눴다. “채사장, 이렇게 늦게 부른 거 이해하오.” 대통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소 미안하다는 듯 채사장을 보며 얘길하는데, “그동안 아시다시피 별여 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잖소.” 이건 또 무슨 동지섣달 얼음 녹는 소린가, 그래.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채사장을 향해 각하께선 손수 반주까지 따라주며 의문에 찬 치하를 거듭하셨다. “그때 채사장이 보내 주신 거사자금… 정말 값지게 활용했소.” 그날 채사장은 전차에도 받혔다 탱크에도 부 딪쳤다가 때로는 밥숟갈에 미끄러진 것도 같 은 환상의 하루를 보낸 후 헤어질 땐 핑크색 복음까지 각하로부터 듣게 된다. “채사장도 언제까지 지방에서 군납업자로만 지낼 순 없잖소? 이제부턴 중앙에서 국가 경 제에 이바지해 줘요. 내 힘껏 도와드리리다.” 각하께서 도와드린댄다. 아, 온 세상 영광 있 으라…! 마치 구름 위에 솜사탕을 타고 노니는 것만 같았던 채사장이 현실로 되돌아온 건 청와대 현관을 나와서였다. 나전무 이 친구, 아까부터 줄곧 의미있는 웃 음을 띠고 있었다. 자신은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한 저 미소. 열차를 타고 내려 회사 에 도착한 채사장이 다짜고짜 나전무를 앉혀 놓고 사실 심리에 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왜 각하께서 내게 고마워하는 거냔 말요?” 나전무가 나직이 고백했다. “제가 은행에서 횡령한 돈은 박소장님의 혁 명 자금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짐작하고 있었소. 그거하고 내 가 묻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요?” “횡령은 제가 했지만 그 돈은 사장님 이름 으로 박장군에게 전달됐습니다.” “……” 더 이상 긴말이 필요치 않았다. 한동안 상하 아래위턱을 분리시킨 채 경악에 찬 모습으로 나전무를 쳐다보던 채사장이 털썩 무릎을 꿇 고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쏟았다. “내가, 내가… 당신보다 덜 살았어… 용서 해 주시오, 나전무…” 그 후, 이 들쥐 엉덩짝만한던 지방 군납회사 는 제2금융권을 도약의 발판으로 화려하게 중 앙무대에 진출하더니 급기야 이 땅 굴지의 재 벌기업으로 변신, 국제 경제 사회에서도 숱한 신화를 뿌리며 지구촌을 누비게 되는데… 두 사람이 청와대를 다녀온 며칠 후, 나전무에게 각하의 프로포즈가 있었다. 나전무가 거절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씨 집에 장관 하나 나올 뻔했던 각료입각 제의, 그러나 나전무는 출세 를 거절하고 고집스레 채사장과의 사업 파트 너로 남았다. 한 꼭지 얘기는 끝났다. ‘功臣’이란 가명을 선택한 작가의 의도도 충분히 설명되었을 줄 안다. <고독한 집무실> 우리는 지금 뒤로만 가는 고물 ‘타임머신’ 을 타고 여행중이다. 60년대의 보릿고개를 거 쳐 소위 ‘개발독재’시대로 일컬어지는 70년 대로, 때로는 온천장 아지매도 만났다가 사라 진 명물 ‘종3’, ‘후암동’ 꽃띠들도 만나 는데, 지금 이 순간은 1961년 1월로 날아왔다. 5·16혁명을 몇 달 앞둔 그 해 설한, 혁명 동지 중 역술에 심취하신 분이 계셨다. 편의 상 그 사람의 이름을 ‘강중령’이라고 명명 한다. 강중령께서 어느 날 또 한 분의 혁명 동지 ‘최중령’의 사무실을 노크했다. “이봐, 우리 점치러 한번 안 가볼래?” 느닷없이 점치러 가잔다. “아니 거긴 왜?” “태조 이성계도 임금 ‘王’자 꿈풀이하러 점바치한테 갔었대잖아.” “우리야 뭐 꿈꾼 것도 없잖아? 대체 뭘 알 아보겠다구?” 갑자기 강중령께서 톤을 깔고 지그시 최중령 에게 속삭였다. “내가 아는 용한 점쟁이가 한 사람 있는데 혁명이 성공할 건가 한번 알아보자구.” 일순, 최중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친구, 그러다 괜히 맞지도 않고 비밀만 새나가면 어쩔려구 그래?” 그러나 강중령에겐 나름대로의 플랜이 세워 져 있었다. “그러니까 먼저 우리 신상 문제를 물어 봐 서 맞으면 실토를 하는 거야.” “그런 다음?” “거사일까지 어디 조용한 데 모셔 두는 거 지, 뭐.” 최중령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건 좀 신 중해야 할 문제였다. 가보는 거야 뭐 어려울 거 있나…만, 목숨 건 혁명 거사를 점바치에 게 누설해도 하자 없을까? 만에 하나, 실패한 다는 점괘라도 나오면 그땐 어떡하나…? 수많 은 혁명 동지들의 선수 사기 문제가 걸려 있 잖은가? 그러나 인간은 때때로 정해진 상식과 공식의 궤를 넘어 돌발적인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 다. 미래를 엿보고 싶은 인간의 기본 심리는 최중령 역시 가슴 한켠에 꿈틀대고 있었음이 라. 두 사람은 중대 결단을 내리고 강중령이 안다는 점바치를 찾아 나섰는데 혁명을 하려 다 보니 별짓을 다해 본다. 진짜… 신분을 감추려고 어울리지도 않는 사복을 껴 입고 언덕빼기 산동네를 타고 올라 와글대는 여자들 틈에 꼽사리 끼어 순번을 기다린 후 드디어 차례가 왔고 면식있는 강중령이 대표 주자로 점바치의 염력 테스팅에 들어갔다. “이 친구 사업이 잘 안 풀려서 왔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50대 후반의 점바치가 안경 너머로 강중령을 힐끔 쳐다본 후 앞에 앉은 최중령을 지그시 노려봤다. “사업이라…” 그리고 손때 묻은 엽전 몇 개를 상위에 던지 길 몇 번… 눈을 감고 허공을 향해 고개 쳐들 어 심각한 명상에 잠기는가 했더니 이윽고 말 문을 열었다. “사업이 아냐, 당신 딸애가 하나 있지?” “딸…이라뇨…?” 순간, 최중령보다 먼저 몸을 움츠린 건 지켜 보고 있던 강중령이었다. 실제 최중령에겐 늦 게 본 딸애가 하나 있어 금지옥엽 키우고 있 었다. 그걸 불쑥 뱉아내니 몸들이 굳어질 밖 에… 최중령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애가… 어쨌다는 겁니까?” “죽어!”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 벼락 같은 악담인 가? 그 귀여운 늦둥이가 죽다니? 최중령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야? 죽어? 왜?” “비명횡사, 객사할 팔자야, 그앤…!” 최중령의 양미간에 굴곡 심한 여덟 팔 자가 패이며 어금니가 깨물어졌다. “이 자슥이 찢어진 아가리로 뭐가 어째?” 급기야 분노한 최중령의 억쎈 손이 가느다란 점바치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어느 부모가 그 소리 듣고 뚜껑 열리지 않겠나, 그래. “한번 더 얘기해 봐, 이 자슥.” 멱살 잡힌 점바치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백 짓장처럼 낯빛이 하얘져 강중령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고 강중령이 몸을 일으켜 최중령 을 부둥켜 안았다. “이봐 왜 이래! 이성을 찾아. 자초지종을 들어 보자구!” “놔, 죽여 버리겠어. 이 새끼!” 고독한 직무실 말 한마디 잘못 뱉은 죄로 입술이 터지면서 옥수수 알이 튕겨져 나가고 눈자위에 푸르죽 죽 칼라가 칠해졌는데, 강중령의 만류가 없었 더라면 아마 사망진단서까지 첨부했을지도 모 를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두 사람은 그 집을 나와 대포집에 여장을 풀었다.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병나발을 불어 대는 최중령을 바라보는 강중령은 고슴도치 마냥 몸이 움츠러들었다. 가자고 꼬드긴 사람이 누군가? 좋은 얘길 들 었다면야 당당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가 못하니 문제라. 그러나 강중령은 뭔가 찜 찜했다. 점바치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그 로서는 그냥 최중령의 심기만 달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봐 최중령, 무조건 미신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는 일이야.” 병나발 불던 최중령이 동작을 멈추고 강중령 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무슨 소리야? 자네도 내 딸애가 죽을지 모 른다는 얘기야, 뭐야?” “이성을 갖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구.” 강중령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게 보였던가 보 다. 최중령이 양미간을 찌푸린 채 강중령을 노려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과학적으로도 풀 수 없는 게 무속 세계야.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게 점쟁이들의 예언 아닌가?” 담배를 피워 무는 최중령을 바라보며 강중령 이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다시 찾아가서 방편을 알아 보세.” “뭐야? 그놈을 다시 찾아가?” “안 들었음 모를까 듣고 그냥 있을 순 없잖 아, 그 점쟁인들 사람 목숨을 함부로 얘기하 겠어? 분명 무슨 처방이 있을 걸세, 자네 딸 애 생사가 걸린 문제야.” 그러나 최중령의 심기는 그걸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고함을 치며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따위 미친놈 넋두린 자네 혼자만으로 끝 내!” 이거 잘하다간 의리에 금가겠다. 텅 빈 객주 집에 혼자 남은 강중령은 생각에 잠겼다. ‘그냥 두고 방관할 건가…’ 어쩌면 강중령 스스로 방관자가 될 당위성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예언대로 최중령의 딸애가 죽는다면 점바 치의 능력이 입증된다. 그렇다면 혁명의 승패 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등식이 성립되잖은 가?’ 그러나 그러기엔 강중령의 심기도 편치가 않 았다. 아무리 그렇기로 친구의 딸애를 미끼 삼다니… 생각에 잠긴 강중령의 발길이 자신 도 모르는 새 그 점바치의 집을 향하고 있었 다. 머리에 붕대를 잔뜩 휘감은 점바치에게 정중 히 사과를 했다. “치료비는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부 모된 마음을 헤아려 혜량해 주십시오.” 그러나 점바치도 배알이 잔뜩 꼴려 있었다. 불문곡직 사람을 개 패듯 두들겨 놓고 사과 몇 마디로 끝날 일인가? “본인이 직접 와야 해!” 이빨 빠진 틈새로 간신히 내뱉는 점바치의 호통은 그러나 단호했다. 강중령이 무릎을 꿇 었다. 이렇게까지 처신하는 강중령에겐 나름 대로의 계산이 있었음이라. “제가 대신 이렇게 사죄를 드리고 있잖습니 까.” 그런데 강중령을 돌아보는 점바치의 표정이 뭔가 모를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 얘기가 아냐! 당신 지금 그애를 살릴 수 있는 방편을 찾자고 내게 온 거 아냐?” “그…, 그렇습니다만…” “그 아일 살리려면 아비가 와서 풀어 줘야 만 해. 무슨 얘긴지 알아들어?” 점바치의 완곡한 뜻을 헤아린 강중령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방문을 나 오는 강중령의 귓전에 점바치의 호통 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물다 지나갔다. “이건 나하고 그 사람하고의 감정 차원 문 제가 아니란 걸 가서 일러줘!” 그러나 가서 일러주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 는 게, 그런다고 달려가 매달릴 친군가. 죽는 다면 그것도 그애의 정해진 운명일 터, 인간 사 하늘에 맡길 밖에… 그리고 며칠 후 어느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시간, 강중령과 최중령은 같은 사무실에 앉아 퇴근 준비에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신문을 뒤적이던 강중령이 뜬금없이 내뱉았 다. “역시 대단하구먼, 대단해.” 서류를 정리하던 최중령이 빙긋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뭐야, 또 무슨 기사를 보고 호들갑을 부 려?” 최중령의 얼굴엔 며칠 전의 점바치 사건 같 은 건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잊 으려고 태연한 척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강중 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흔셋에 대통령이라, 그것도 아메리카 대 륙을 호령하는 지구촌 합중국 최고 통수권자, 대단하잖아.” “왜 부러워?” “대체 이 양키 애들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 르겠단 말야.” 세상은 온통 새로 뽑힌 미국의 새파랗게 젊 은 대통령 케네디 얘기로 가득 차 있었다. 팔순 노인네에 쉰 세대 대통령만 모셔 본 반 도남단의 국민들로선 거대한 나라의 마흔셋짜 리 대통령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강중령이 부러운 듯 얘기했다. “젠장, 나도 일찌감치 방향을 틀었음 어떻 게 됐을지 또 알아?” 캐비닛에 서류를 쑤셔 넣는 최중령 책상의 전화 벨이 몸부림을 치며 울어댔다. “뭐야? 비상대기하라는 거 아냐, 또…?” 그런데, 수화기를 귀에 댄 최중령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대신 눈자위에 핏발이 모아졌 다. “뭐야? 언제…” 심상찮은 최중령의 고함 소리에 강중령이 신 경을 곤두세우며 쳐다봤다. “어디야, 거기가 지금 어디냐구? 뭐? 의사 사망 진단…?” 그리고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넋을 잃은 듯 강중령을 쳐다보는 최중령의 이마에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왜 그래, 최중령. 무슨 일이야?” 강중령에겐 얼핏 섬광처럼 뇌리를 후려치고 지나가는 감이 있었다. “말을 해봐, 이 친구야. 뭐야? 대체 무슨 일 이냐구?” 노랗게 변색된 최중령의 얼굴이 사태의 심각 성을 더해 주며 띄엄띄엄 신음하듯 몇 마디 내뱉었다. “우리 애… 미나가… 딸애가…” 순간 강중령의 온몸은 닭살로 치솟으며 전율 이 타고 흘렀다. 휘청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는 최중령의 입에서 두서없는 멘트가 쏟아지 고 있었다. “트럭에 치어… 세발 자전거를… 타고… 언 덕길을 내려가다…” 강중령은 친구의 불행보다 점바치의 신기에 가까운 예언력에 더욱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화장한 뼈를 북한산 계곡에 뿌리는 날, 하늘 은 눈발까지 흩뿌리며 분위기를 돋구고 있었 다. 어린 걸 가슴에 묻은 엄마의 애끓는 오열 을 귓전에 스치며 강 중령은 내내 아직도 피 멍이 들어 있을 점바치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문득 혼자서 오열을 삼키고 허공을 바라보고 선 최 중령을 쳐다봤다. 최 중령의 뒤로 다가 선 강 중령이 나직이 신음하듯 얘기했다. “날…, 용서해 주겠나…” “자네 탓이 아냐.” “난 어쩌면…, 자네 딸애가 죽길 바라고 있 었는지도 몰라…” 그러나 최 중령은 돌아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미동도 않고 있었다. 강 중령의 고해성사가 독백처럼 이어졌다. “거사 계획을 점쳐 볼 욕심으로 자네 딸 이… 어떻게 되나… 관망만 하고 있었는지 도…” 바위처럼 굳어있는 최 중령을 돌아보며 강 중령이 고함쳤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친구야!” 최 중령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 갔다. “사람들이 듣고있어. 가볼 곳이 있네. 따라 와…” 최 중령이 앞장 서서 찾아간 곳은 바로 그 점바치의 집이었다. 묵묵히 대문을 밀치고 들 어가는 최 중령의 뒤에서 강 중령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봐, 최동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이 사람 탓이 아니잖아!” 최 중령은 종래 말이 없이 불문곡직 방문을 열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무 서우리 만치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긴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은 그냥들 돌아가 주십시오” 사람들이 최 중령의 핏기 가신 엄숙한 표정 에 분위기를 탔던가 보다. 하나 둘 버티고 선 최 중령의 눈치를 살피며 방문을 열고 빠져나 가는데, 졸지에 들이닥친 두 사람을 하얗게 질려 쳐다보는 역술가를 저승사자의 모습으로 한동안 응시하던 최 중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 다. “당신 예언대로 딸애가 죽었소” 순간 점술가는 앉은 채 뒤로 멈칫 물러앉으 며 덫에 걸린 토끼 새끼마냥 파르르 떨고 있 었다. “내… 내탓이 아니오…” “알고 있소. 때문에 이렇게 사과하러 온 거 요” 잠시 혼돈이 오는 듯 멍하니 쳐다보는 점바 치 앞에 최 중령이 바위처럼 좌정해 앉았다. “그리고 한 가지, 꼭 들어 줘야만 될 간청 이 있소이다” 영문을 모르긴 줄레줄레 따라온 강 중령 역 시 점술가와 다를 바 없었다. “내 딸애의 죽음을 예견한 그 능력으로 한 가지 중대한 일을 점쳐 주셔야겠습니다” “……?” “우린 지금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을 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중대한 모험을 하려 하 오” 일순 강 중령의 코끝이 찡하게 시려 왔다. 그리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이 번엔 역술가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방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트렸다. “군인들이셨군요…” 최 중령이 다그치듯 점바치를 노려보며 얘기 했다. “말해 주시오. 성공이오, 실패요?” 기왕에 까발린 처지다. 최 중령과 강 중령의 눈에선 알듯 모를 듯한 살기까지 서려 있었 다. 한동안 두 사람의 살기어린 눈길을 응시 하던 점바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 “옷을 갈아입고 오겠소. 기다려 주시겠 소?” 무슨 소린가? 막 중대사를 터뜨렸는데 자리 를 뜨겠다니…! 나가서 어딘가 전화라도 한 통 해버리면 만 사 도로 아미타불이다. 강 중령이 황급히 일 어서서 점바치를 향해 고함쳤다. “이, 이봐…! 어딜 나가려는 거야?” 최 중령이 강 중령의 소매를 잡으며 자리에 앉혔다. “그냥 두게” “이 친구야, 나가서 고변이라도 하면 어떡 할 거야? 우리 둘의 목숨만 걸린 게 아니잖 아!” “하늘의 뜻일세” 최 중령의 얼굴은 세상을 깨우친 달마와 같 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딸애의 죽음도, 혁명의 승패도 하늘만 이 알고 있어. 내 말뜻 모르겠나?” “……!” “그 천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는 지금으 로선 저 친구뿐이야. 저 친구가 신고를 한다 면 우리의 거사도 실패라고 봐야겠지…” 요약하면 그 역시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자 는 말씀인데, 잠시 후 두 사람의 우려를 불식 시키고 단정히 새옷을 갈아 입은 점바치가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도의 숨을 가슴으로 쓸어 내리는 강 중령과 최 중령 앞에 우뚝선 점바치가 느닷없이 두 사람에게 큰절을 올리 는 거 있지? “두 분께 바치는 절이 아니오” 그럼 그렇지…, 그렇게 두들겨 맞고 뭐 고맙 다고 큰절까지 올릴까. “목숨 건 수많은 동지들…, 그리고 그 지도 자께 간청이 있어 드리는 절이외다” “……?” “당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쪼록 가난과 도탄에 빠진 이 나라 백성들을 구해 주십시오” 강 중령과 최 중령은 고압선에 감전된 혼돈 의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혁명이 성공할 거란 뉘앙스 같기도 한데 결정적인 힌트를 안 주니 판단에 혼란이 올 수 밖에…, 두 사람의 심경을 눈치로 긁었던가 보다. “당신들의 거사가 성공하는 날까지 내 거처 를 정해 주시겠소?”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최 중령이 지그 시 어금니를 깨무는 순간 강 중령은 점바치의 두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를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럼…!” “그 동안 미뤘던 공부나 좀 해야겠소이다” 굳어있던 최 중령이 점바치의 두 손을 맞잡 았다. “선생…!” 언제는 미친놈, 죽일 놈 개 패듯 두들겨 패 더니 이젠 선생…? 어쨌거나 그날 이후 그 역 술가의 모습은 5·16혁명일까지 사람들 시야 에서 종적이 묘연해지는데, 혁명의 새벽이 지 난 후 그 역술가는 거인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그의 집 문턱은 고관대작들의 발길로 마르고 닳아지면서 장안은 물론 전 국토에 그의 명성 이 도배질된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기억을 떠올릴 이 역술가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는 에필로그를 하나 남겼다. 그날…, 역술가의 큰 절을 받고 나온 두 혁명 동지. 집을 나오면서부터 줄곧 입을 봉하고 있던 최 중령이 이윽고 침묵을 깨뜨리고 강 중령을 불렀다. “이봐, 강동지” 엔간해선 ‘동지’란 호칭을 쓰지 않는다. 그건 혁명동지들 간의 불문율로 정해져 있었 다. 그런데 지금 최 중령은 감히 그 불문율을 깨고 ‘동지’를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위압감 같은 게 묻 어 있었다. 이거 뭐, 남의 일처럼 얘기하고 있잖아. “……?” “거사가 성공하면 뒤켠에서 지켜 보겠네” “…무슨 소리야? 최 중령” “권력이란 묘해서 자칫 본래의 목적을 타락 시키는 법. 그걸 이겨 낼 자신이 내겐 없 어…” 두 사람의 발 밑엔 늦겨울의 석양으로 그림 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건 죽은 내 딸애에게도 애비된 도리가 아닐 것 같아” 그 한마디를 남기고 휘적휘적 최 중령은 저 만치 노을을 등지고 걸어갔다. 그리고 5·16의 숨가쁜 새벽의 현장을 지키 고 섰던 최 중령은 이틀 후 거사의 성공을 알 리는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이 있던 날…, 자 신의 약속대로 모든 부귀영화(?)를 내팽개친 채 경남 양산 어느 산속 암자로 발길을 돌렸 는데 훗날, 모처럼 필드를 한바퀴 돈 후 클럽 하우스에서 각하와 단둘이 곰탕 그릇을 비우 던 강 중령에게 느닷없는 각하의 하문이 있었 다. “임자, 요즘 그 친구 왜 안 보여?” 그 친구라니? 친구가 어디 한둘인가? 길거 리에 널리고 발바닥에 채이는 게 친구들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까지 연줄만 닿으면 친구하 자 덤비는 이 세월에 느닷없이 그 친구라니? “누구… 말씀이십니까? 각하” “최 동지 말이야, 혁명 후론 한 번도 본 적 이 없지, 아마…?” 각하께서 기억하고 계셨구나… 그러잖아도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말씀 올리려던 참이었 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같이 손잡고 일해 보고 싶었다. “각하, 실은…” “실은 뭐야? 왜, 그 친구에게 무슨 일 있 어?” “각하…” 그 날, 강 동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둘 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각하에게 죄 풀어 놓았다. 역술가의 예언부터 최 중령 딸애의 비명횡사, 최 동지와 역술가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거사 성공…, 암자 칩거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각하께서 파이프 담배를 담아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구만…, 거 왜 진작에 얘 길 안했어” 그리고 각하는 생각에 잠긴 채 차에 올랐다. “이봐 임자, 마지막 말이 뭐였다구?” “네…? 각하, 무슨 말씀이신지…?” “최 동지가 임자한테 부탁했다는 말 말야” “그게…, 권력이란 묘해서 자칫 인간을 타 락시킬 수 있다…, 부디 도탄에 빠진 국가와 민족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각하는 청와대로 돌아올 때까지 유구무언,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청와대 현관에 내릴 때야 뒤에 서 있는 강 동지를 돌아보았다. “어이, 토요일 오후니까 별 스케줄 없지?” “그, 그렇습니다만 각하…” “됐어. 그럼 나하고 한잔하고 가. 아침에 보 니까 더덕구이가 올라왔더군. 아직 남아 있을 거야” 더덕구이가 그렇게 고급스러운 안주감으로 보였던가 보다. 모처럼 뭉친 혁명 동지에게 더덕구이를 대접하시겠다니 말이다. 각하의 술 습성은 때로 상대방을 헤매게 하는데, 오 늘은 탁주에 맥주를 섞어 드셨다. “이게 무슨 술인지 알아?” “글쎄요…” “‘맥탁’이라고…, 내가 개발한 술이야. 한 잔 해봐. 마실 만해” 술이 몇 순배 흐를 동안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가슴은 최 중령의 사연으로 무겁게 짓눌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각하께서 먼저 운을 떼셨다. “혁명이네 합시고 우린 그 동안 뭘 했지?” “……” “권력에 발을 디뎌 때 묻히지 않겠다…?” 술잔을 기울이며 상 위에 오른 더덕과 함께 독백을 씹던 각하께서 돌연 강 동지를 향해 정색을 했다. “임자, 당장 찾아와!” “……?!” “그 친구, 최 동질 찾아서 데려오란 말야. 내가 오란다구 해. 내가 최 동지를 필요로 하 고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구…” 불감청이면 고소원이랬다. 강 동지로서도 바 라던 바 아닌가? 이튿날 강 동지는 경남 양산일대를 샅샅이 뒤진 후 가까스로 계곡 구석진 암자에 숨은 듯 들어앉아 속세를 잊고 도인 행세를 하는 최 동지를 찾아 내 두 손을 맞잡고 해후의 눈 물을 산자락에 한없이 뿌렸다. 한번 터진 사 나이들의 눈물은 끝간 데를 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지난 사연을 되새김질하며 해후의 눈물을 계곡에 뿌리고 있던 그 시간, 각하께선 왠지 사춘기 소년처럼, 소풍날을 앞 둔 초등학교 코흘리개 마냥 들떠 있었다. 집 무실에서 멀리 청와대 입구를 건너다 보기 수 차례, 다시 인터폰을 두들겨 재촉했다. “이봐, 아직 연락 없어? 경남도청에 전화해 봐. 그 친구 찾았는지 어쨌는지 말야” 누가 말했던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지 금 각하의 속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황당한 犬音인가를 금방 느끼게 될 것 이다. 옛친구를 기다리는 마음, 그렇게 우정이란 물감으로 채색된 한폭의 수채화를 기억과 가 슴 속에 한없이 그려 나가던 각하의 작업을 책상 위 전화 벨이 중단시켰다. “그래, 어떻게 됐대? 연락 왔어? 찾았대?” “네. 찾았답니다, 각하!” 기기를 통해 전달하는 비서관의 목소리까지 반가움에 떨리고 있었다. “그럼 빨리 데려오지 않고 뭐 한대?” “곧 상경할겁니다, 각하” “비행기 타고 오라 그래. 그게 빠르잖아” 그러나… 각하의 하명에 의해 비행기 타고 날아온 건 강 동지 한 사람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 는 강 동지의 표정이 장막을 드리운 듯 짙은 회색으로 굳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각하” “아니, 왜 혼자 왔어? 최 동진…?” 강 동지는 각하의 질문에 대답 대신 품 속에 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디밀었다. “각하, 우선 이걸 봐주십시오” “……” 의아해하며 펼쳐본 흰 봉투 속엔 최 동지의 몇자 상서가 곱게 접혀 들어 있었다. <각하, 비록 머리를 깎진 않았으되 이미 속 세를 떠난 몸이옵니다. 모쪼록 남은 여생을 먼저 간 딸애와 뒤따라간 망처의 혼백과 함께 하게 해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편지를 구겨 쥔 각하의 손이 잠시 허공을 맴 도는 듯 자리를 못 찾고 있었다. “…안식구도… 죽었나…?” “딸애를 잊지 못해 시름에 젖어 있다가 1년 후에 그만…” 각하께선 또 침묵을 지키셨다. “이유 없어. 임자가 맡아서 5개년 계획 그 거 적극 추진해 봐. 할 수 있는 한 다 밀어 줄게” 거역할 수 없는 한밤의 각료 임명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온밤을 하 얗게 ‘외자도입’, ‘중화학’, ‘수출증 대’, ‘농어촌 복지사업’ 등으로 홀랑 까먹 은 각하께선 동창이 훤히 밝아오자 아쉬운 듯 그 무거운 엉덩이를 비로소 일으키셨다. “벌써 날이 샜나? 무척 빠르구만…” “아침 드시고 가시죠” “아냐, 애들 깨기 전에 가야지, 이따 청와대 들어와” 가실 땐 쓰루의 자가용을 이용하셨는데, 점 차 각하는 밤늦게 쳐들어오시는 데 탄력이 붙 었다. 걸핏하면 “나 정희요. 문 열어 줘요” 안방마님의 단잠을 깨우기 수삼차, 급기야 잦은 야습이 미안해지셨던지 작전을 바꾸셨 다. 이번엔 밖으로 끌어 내는 거 있지? 느닷없이 청와대에서 차가 나오고 중요한 일 있어 각하 가 부르신다며 태워간다. 술친구 만드는데 캐리어가 붙으셨단 얘긴즉, 막중국사를 논하시겠다니 말릴 수도 탓할 수 도 없고, 그렇다고 하늘 같으신 각하를 마냥 콩나물국으로 배 채우게 하기는 더더욱 그렇 고, 어쩌다 선지를 장만해서 정성껏 해장국을 준비해 둘라 치면 또 안 오신다. 급기야 사모 님은 ‘캔세라 세라’를 작심하셨는데, 얘기 가 어째 좀 그렇다. 자꾸 해장국 쪽으로 흐르는 감이 없잖아 있 지? 술 고픈 사람들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무슨 얘기하다가 동동주가 나오고 콩 나물국, 선지국이 동원됐었지? “……?” 응, 그래! 강동지, 최동지와의 이별을 서러워 하던 각하의 고독한 독백…! 그 사연을 알아보고자 시작했는데, 세상에 까먹을 걸 까먹지, 원… 그때 그렇게 고독한 통치자의 외로운 넋두리 가 청와대 경내에 울려 퍼지면 어김없이 다가 와 따뜻한 미소로 각하를 감싸주던 분이 계셨 다. 육영수 영부인… 그러나 그 영부인마저 이젠 각하의 곁을 떠 나 다시는 못 올 곳으로 가버리셨다. 그날도 덩그러니 넓은 거실 침대에 혼자 누 운 각하는 맞은편 벽,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영부인을 잠시 바라본 후 잠자리에 드셨는데 새벽녘이었던가…, 저녁내 이글거리던 속이 끝내 복통을 일으켰다. 저녁 드신 게 하자를 발생했나…? 위장이 꼬이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다 못한 각하께서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을 기다시피하여 방문 쪽으로 필사의 행진 을 거듭, ‘근혜’, ‘근영’ 그리고 비서진을 애타게 불렀는데 복부가 조여들면 외침이 작 아진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애타게 불렀 건만 밖에까진 들리지 않았음인지 ‘콜’이 없었다. 배를 안고 뒹굴던 각하의 시야에 문 득 저만치 액자 속에서 미소 띤 영부인의 모 습이 들어왔다. 각하는 기어드는 소리로 피를 짜는듯 오열을 삼켰다. “…임자…, 배가, 배가 아파… 어쩌면 좋은 가… 말 좀 해줘…” 그러나 여사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잔잔한 미 소만 보내고 있었다. “야속한 사람아…, 어째 먼저 가버렸노…” 각하는 그날 밤 아픔도 잊은 채 먼저 간 영 부인을 한없이 원망하며 눈물을 쏟았는데 뒤 늦게 달려온 비서진에 의해 다행히 구조되었 다. 늦은 밤 출출해진 배를 채우고자 몸소 주방 에 들어가 냉장고를 뒤져 쓰린 속을 채우다 같은 목적으로 들어온 비서진들에게 들켜 멋 쩍게 웃던 대통령… “배가 출출하더구만. 이 친구들아, 침대 맡 에 비스킷이라도 좀 가져다 놔” 그리고 비서진이 급히 차린 야식을 꿀맛처럼 먹던 양반… 우리는 최고 권력자의 카리스마 만 알았지 그의 고독은 모르고 있었다. 고독한 집무실의 이중적 뒷면을… 영부인의 빨간 사과 1970년도 저물어 가는 12월 어느 날… 높으신 서방님들 출근 행차를 마친 고관 마 나님들께서 라면 몇 봉지 사 들고 사진 기자 대동해서 고아원, 양로원 달려가 서방님 명함 걸고 사진 몇 장 박은 후, 오후엔 크리스마스 쇼핑이나 가자고 미장원을 향해 마악 현관문 을 나서는데 전화 벨이 발목을 잡았다. 이른 아침부터 어느 년이 또 수다를 떨자고 전화질을 한 모양이라고 발길을 돌리는데 수 화기를 건네 주는 가정부가 다급하게 소리쳤 다. “사모님, 청와대 영부인님이래요” 아이구, 그럼 얼른 받아야지. “네, 사모님. 아니 영부인님…!” “어때요. 생각이 계신 분들은 오늘 저하고 소록도 나환자촌에 가지 않으실래요?” “그, 그럼요. 그러잖아도 그런 곳에서 소외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나 해 야지 하고 생각하던 참인걸요” 시간이 있고 없고가 어디 있나. 영부인 가시 는데라면 어디고 따라 붙어야 그게 내조라. “좋아요, 그럼 11시까지 들어오실 수 있겠 죠? 다른 사람들도 그때 오기로 했으니까요” 으음, 다른 년들도 꼽사리 끼는 모양이구 나… 그렇담 더더욱 빠질 수 없고 오늘 가서 영부인 앞에서 명사봉공하여 남들보다 더욱 튀어 보자…! 그런데, 불문곡직 동행하겠다고 덜컥 약속을 하고 보니 행선지가 소록도란다. 아니 그럼, 그 썩어 문드러진 나병환자들을 찾아가 목욕시키고 밥해주고 뒤 닦아주란 얘 기 아냐…? 눈앞이 캄캄한 거 있지? 불현듯 옆에 웃고 서 있는 가정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괜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엌일 끝났어요? 왜 그러고 서 있어?” 아, 오늘은 죽었다!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새끼들처럼 마 지못해 소록도로 향하는 마나님들의 행렬이 자못 비장했는데 정작 영부인께선 기분이 그 렇게 화창할 수가 없어 보였다. “다 오셨어요?” 미소를 머금고 버스 안을 휘둘러 살피던 영 부인의 양미간이 갑자기 좁혀졌고 그게 곧바 로 차에 타고 있던 여러 마나님들 뇌리에 휠 이 되어 전달됐는데, 영부인께서 차갑게 고개 를 돌리며 외쳤다. “출발하세요!” 왜이신가, 어째서 갑자기 심기가 뒤틀리신 건가… 리더이신 영부인께서 입을 봉하고 계 시니 버스 안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으로 짓눌 렸는데, 어느 입심 좋고 넉살 좋은 여편네 한 분이 사이다를 한 컵 따라 영부인 자리로 다 가갔다. “여사님, 한잔 드시죠” 그런데 컵을 받아든 영부인께서 넉살 좋은 여편네 손가락의 반지를 보며 일침을 갈기셨 다. “그 반지, 꽤 비싸 보이는데 무슨 보석이 죠? 난 그런 건 아직 한 번도 안 끼어 봐 서…” 순간, 그 입심 좋고 엔간해선 물러서지 않는 여편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영부인의 빨간 사과 유구무언이 된 입심의 대명사께서 휘청휘청 자기 자리로 돌아오자 영부인께서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정말 너무들 하시는군요. 지금 가는 곳이 어디에요? 어렵게 사는 나환자들 봉사하자고 가는 사람들 복장이 그게 뭡니까? 어디 패션 쇼장에 옷자랑들 하러 가세요?” 문득 차 안을 둘러 보니 영부인만 빼고 하나 같이 고급 모피 외투에 유명 디자이너의 코트 들을 걸치고 립스틱 짙게 발라 머리를 올리고 앉아 있다. 게다가 손가락마다 영롱한 다이아, 비취 반지에 목걸이, 귀걸이… 스스로들 생각 해도 너무했고 영부인이 뿔 돋칠 만 했다. 그 렇다고 차를 돌릴 수도 없는 일, 영부인의 불 편한 심기를 담은 채 버스가 나환자촌에 도 착, 사치품들을 쏟아 부었는데, 이 여편네들이 앞더퉈 식당 봉사, 복도 청소, 방 청소, 변소 청소를 자원하는 거 있지? 얼굴 씻기고 머리 감기고 목욕시켜 옷 갈아 입히는 건 서로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다. 스 킨십, 즉 피부 접촉은 안하시겠다는 의지 표 현들인데 영부인께서 노는 꼴을 한참 보더니 스스로 나환자 방에 들어가 옷을 벗겨 얼굴을 씻기기 시작했다. 아부의 극치를 이루는 어느 마나님이 놀란듯, 또 무척 걱정스러운듯 영부 인에게 다가가 아뢰었다. “아니, 영부인님! 직접 얼굴을 씻기시면 안 됩니다” 영부인께서 하던 일을 계속하며 차갑게 대꾸 했다. “됐어요, 가서 다른 일 보세요. 환자들 씻기 고 감기는 건 제가 하겠어요” 오늘 영부인은 이래저래 심기가 뒤틀렸고 줄 레줄레 따라 나섰던 여편네들은 일진이 안좋 았던가 보다. 제각기 위치에서 뭉그적뭉그적 마지못해 어거지 봉사활동들을 하고 있었는 데, 마지막 환자 목욕을 끝내고 마악 부엌으 로 들어와 물 한잔에 목을 축이고 있는 영부 인 앞에 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나환자 하나 가 쭈뼛쭈뼛 다가와 멈춰 섰다. 물을 마시던 영부인이 나환자의 붕대 감은 손을 잡고 얼굴 을 가까이 대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세요. 제게 할말이 있으신가 보 죠?” 부엌에 몰려 있던 고급 마나님들 시선이 일 제히 영부인과 나환자에게 집중되면서 숨을 죽였다. 나환자가 쭈뼛거리며 한 손에 들었던 작은 대나무 소반을 내밀었다. 손을 감은 붕대는 쉴새없이 흘러 내리는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 었고 그 작은 대나무 소반엔 사과 몇 알이 담 겨져 있었다. “저희들이 영부인님께 드릴 것이라곤 이것 밖에 없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여사님” 그러면서 그 붕대 감은 손으로 흐르는 눈물 을 닦았다. 여사는 그 사과를 손에 집어 들며 입고 있던 앞치마로 나환자의 눈물을 닦아 주 었다. “맛있겠네요. 이렇게 소중한 선물은 난생 처음 받아 본답니다. 정말 감사하다고 모두에 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거 여기서 먹어도 되죠?” 나환자 사내가 눈물이 그렁한 얼굴을 들어 영부인을 쳐다봤다. “영부인님…!” 여사는 그 사과를 덥석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창 밖과 부엌 저편 복도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오기 시작했다. 영부인은 사과를 맛있게 먹으며 그들에게 다 가가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얘기했 다. “여러분이나 저나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 들이나 다 같은 사람이고 이 나라 국민들이에 요. 왜 제가 여러분들이 권한 사과를 못 먹을 거란 생각들을 하셨죠? 오늘 전 여러분들 덕 분에 정말 맛있는 사과를 맛보게 되었어요” 훌쩍이는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영부인의 눈에도 이슬 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 사과, 저기 오늘 저하고 같이 오신 분 들에겐 안 줄 참이예요. 청와대 가져 가서 대 통령께도 맛을 보여드려야죠. 그게 좋겠죠, 여 러분” 영부인은 나환자들의 흐느낌 속에 눈물을 삼 키며 사과를 달게 먹고 있었는데, 뒷켠에 서 서 지켜 보던 어느 고관 부인이 눈물을 닦으 며 중얼거렸다. “저분은… 하늘이 내신 분이야…”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앉은 각하께서 영부 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임자, 임자 오늘 나환자들 울렸다며?” “자기들만 울었나요? 저도 울었는 걸요, 뭐?” “그래 그 사과 정말 가져 왔어?” “한 개 드셔 볼래요? 가져 올께요” “먹어야지, 임자가 먹었는데 나라고 왜 못 먹어?” 여사가 일어나 싱크대 속에서 사과를 한 알 꺼내 왔다. “음, 빨간 게 아주 맛있겠구만” 각하께서 덥석 한입 베어 물고 사과를 돌려 봤다. “아마, 그 사과 맛 아무도 모를 거예요” 여사께서 웃으며 대통령 남편을 쳐다봤는데, 갑자기 각하께서 영부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디 손 좀 한번 만져 봅시다” “어머 흉스럽게 갑자기 왜 이러세요” 영부인이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대통령은 놓아 주지 않았 다. “이 손이 오늘 나환자들과 악수한 자랑스러 운 손이구만, 헛헛”그리고 각하께선 그윽한 눈으로 영부인을 쳐다보았다. “임자, 고마워…” 원래 각하는 무뚝뚝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분이다. “임자 고마워…” 각하의 그 한마디는 실로 파격적인 표현이었다. 두 내외는 나환자들이 선물한 사과를 안주 삼아 오랜만에 한잔씩 나 누었는데, 갑자기 생각난 듯 대통령이 영부인 을 쳐다봤다. “그런데 임자,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무슨…?” “퇴청하려는데 갑자기 몇몇 친구가 올라와 선 자기 안식구가 원래 남한테 빠지기 싫어하 는 성격이라느니, 벌레 하나 못 죽이는 체질 이라느니 늘어놓고 가더구만. 왜 그래?” 낮에 영부인께 쫑코 먹은 마나님들 얘긴 것 같은데, 그새 서방님들한테 일러 구명운동을 개시한 모양이라… “오늘 임자하고 같이 나환자촌 갔던 식구들 아냐?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그냥 좀… 타일러 줄 얘기가 있 어서 한마디 해 줬어요” 각하께서 담배를 피워 물며 혼잣말처럼 내뱉 었다. “사치들이 심하지? 임자 눈엔 거슬릴 거 야” 이 양반… 다 내려다보면서 능청 떨고 계시 잖나. 그나저나 영부인의 심기는 꽈배기처럼 뒤틀리고 있었다. 이 아줌마들이 그렇게 알아 듣도록 얘기했음, 스스로 뉘우치고 자숙이나 할 게지, 그걸 또 서방님들한테 일러 바쳐 몸 보신이나 하려 들어? 안 그래도 나환자들 앞 에서 몸사리던 게 내내 거슬려 청와대 돌아와 서도 그걸 삭이느라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인데 뭐…? 남한테 빠지기 싫어? 벌레 하 나 못죽여? 여사의 뒤틀린 심기를 눈치 긁은 대통령이 한마디 어드바이스를 던졌다. “너무 심하게 하진 마. 눈 밖에 났다고 걱 정들이 태산인 것 같은데 내일 청와대로 불러 좀 다독거려 줘” “알겠어요…” 대통령 말씀이 없었어도 조만간 소집시켜 한 마디 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서울 사대문 안 고관댁 사모님들께 비상이 걸렸다. 어제의 ‘고뇌에 찬 행사’로 인해 바짝 조여 들었던 심신을 풀어야겠다고 아침 부터 느긋하게 늘어져 있던 마나님들 집구석 들로 느닷없는 영부인의 호출이 하달됐다. 말씀이야 뭐, 청와대 올라와서 차나 한잔씩 나누자시지만 암만 계산을 꼽아봐도 오늘은 그냥 차나 나눌 타이밍이 절대 아니다. 바로 어제 해놓은 일이 있다. 그게 불안해서 낭군님들께 도움을 청했고 각하를 통한 간접 방식으로 자기 변명들을 올렸는데 아마 그래 서 더욱 자존심이 상하신 게 틀림없음이라… 어제의 경험을 오늘에 되살려 저마다 가락 지, 팔찌, 목걸이, 귀걸이 등을 일체 거두절미 하고 값싼 ‘나이론 유똥’ 치마 저고리로 몸 을 감싼 마나님들의 천근 같은 발걸음들이 청 와대로 모아졌는데, 여사님의 표정은 의외로 밝아 보이니 웬일인가? “어서들 오세요. 어제는 수고들 많으셨 죠?” 영부인님은 표정 관리도 잘하신다. 속으론 잔뜩 화가 나 있으면서 겉으론 웃으신다. 누 가 모를 줄 알고… “어머, 오늘은 옷들이 아주 화사해 보이네 요?” 봐, 이제 슬슬 꼬기 시작하시잖아, 뭐… “어제 내가 한 말 기분 나쁘셨죠?” 차 안에서 보석 달고 휘젓다가 영부인한테 한방 먹은 사모님께서 흠칫 몸을 사렸다. “혹시 기억들 나세요? 왜 얼마 전에 우리나 라를 다녀 간 ‘니제르’ 공화국 영부인 말예 요” 아니… 뜬금없이 아프리카 대통령 마누라 얘 긴 왜? 이거 분명 무슨 꿍꿍이가 계시고 복선 이 깔려 있다. 이럴 때 헤매면 뒤통수 얻어맞 는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그 인구 4백만 니제르 공화국의 독립 영웅 ‘디오리’ 대통령 영부인 ‘마담 디오리’ 말씀이시죠, 여사님?” ‘거리’를 찾아 열심히 머리 회전을 하던 어느 고관댁께서 장황한 설명으로 자신의 기 억력을 남김없이 과시하고 나섰다. “기억하시는군요. 그래요, 그 ‘마담 디오 리’ 얘기들 들으셨어요?” “……?” “……?” “여러 국가 원수들이 우리나라를 다녀 갔지 만 그분만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아무래도 오늘 영부인께선 직접적인 화법을 피하실 모양이시다. 정말 아름다운 퍼스트레이디였다. 소문대로 눈이 부신 아프리카의 미인이었다. 정부의 비 동맹 외교 정책에 따라 한국을 방문한 아프리 카의 ‘니제르’ 공화국 ‘디오리’ 대통령의 영부인 ‘마담 디오리’는 그렇게 한국에 도 착하는 날부터 내외신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 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의전실에서는 마담의 그 아름다운 미를 지켜 주기 위해 특별 관리를 준비했다. 미8군 전용 미용사를 퍼스트레이디가 머무는 영빈관에 투 입, 당장 오늘 저녁에 있을 양국 정상 만찬장 에 나올 마담 디오리의 머리를 다듬게 특별 배려를 했는데, 만찬 직전 육여사에게 난처한 보고가 올라왔다. “큰일났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만찬은 취소 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여사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국가간 의전 행사를 취소하다뇨?” “마담 디오리 여사께 일이 생기셨습니다” 마담 디오리가 아무리 아름답고 예뻐봤자 어 쩔 수 없는 아프리카의 ‘니그로’ 혈통이다. 깜종 특유의 꼬불꼬불 말려 올라간 곱슬머리 는 절대권자의 영부인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이번 나들이를 위해 실로 피나는 노력 끝에 그놈의 곱슬 머리칼들을 한올 한올 정성 껏 펴서 폼을 잡고 왔었고 그래서 마담은 헤 어 패션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저녁 만찬의 프리마돈나로 한바탕 휘저을 궁 리를 하고 있었는데, 미용사가 평소 버릇대로 마담의 머리에 ‘드라이어’를 덮어 씌워 머 리칼을 지져버린 거 있지? 거울을 쳐다보는 마담의 얼굴이 황당하다 못 해 넋을 잃은 채 한동안 상하 아래위 턱을 고 정, 분리시키기 수삼분… 급기야 눈물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황당하긴 미용사도 마찬가지. 울고 보채는 아이 달래듯 마담을 달래 다시 원상복귀 작업 에 돌아갔는데 이게 또 볶아 말아 올리긴 쉬 워도 다시 펴는 데는 시간이 엄청 걸린단다. 보고를 듣고 있는 육여사도 황당했다. “그래서 만찬에 참석 못하겠대요” “아직도 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만찬 시각을 넘겨야 끝날 것 같답니다” “할 수 없죠. 대통령께선 알고 계신가요?” “이미 만찬 취소 통고가 저쪽에서 왔습니 다” 부랴부랴 청와대 식당에 저녁 준비를 시켜 각하와 함께 저녁 한술을 때운 여사는 줄곧 마담 디오리 쪽에 안테나를 꽂고 있었다. “아직도 멀었대요?” “이제 겨우 끝났습니다, 여사님” 모셔 온 손님들 아닌가, 불편하게 했다면 의 전상 엄청난 실례다. 어쨌거나 원상복귀시켰 다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라… 한숨 돌리고 마 악 잠자리에 들려는 여사에게 두 번째 교신이 올라왔다. “두 분이 심하게 다툰 것 같습니다. 각 방 을 쓰고 저녁도 거르고들 계십니다” 난처하게 됐다. 잘하자고 한 짓이 부부싸움 의 경지까지 끌고 간 셈인데, “김학렬 부총 리 사모님 그곳에 계시죠? 좀 바꿔 주세요” 영접 책임을 맡고 있는 김 부총리의 사모님 이 수화기에 나오자 여사님께서 소근소근 뭔 가 특별지령을 하달하셨는데, 잠시 후… 호텔 보이에게 음식상을 들린 김 부총리 사 모님께서 마담의 방을 노크하고 있었다. 문을 연 마담의 눈동자위가 퉁퉁 부어 올라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굳이 통역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담의 현재 기압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 영약을 대통령께 드렸으면 하는데요, 마담” 부총리 사모님께서 호텔보이에게 들려 온 대 접들을 받아들고 얘기했다. “그럼 직접 갖다드리면 될 걸 왜 이곳으로 가져 왔죠?” 그거 누가 모르나…? 두 사람 화해 붙이자고 꼼수 쓰는 것도 모르고 딴소리는… “우선 이 약에 대해 설명부터 드려야겠군 요” 이 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고대 중국 황 실의 전래 비법이요, 동양의 선약으로써, 일찍 이 중국 진시황이 삼천 궁녀를 거느린 것도 이 약 때문이고, 동방의 삼천갑자도 이 약을 먹고 장수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요…?” 사모님의 세치 혀에 말려 들었음인가… 마담 께서 다소의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그런데 이 영약은 영부인께서 직접 설명을 드리고 같이 잡수셔야 효력이 나타난답니다” 부총리 사모님은 능청스럽기도 하신데 정력 에 좋고 장수한다는 설명에 껌벅 간 모양이 다. “어쩔 수 없군요. 우리 함께 가요” 그리고 잠시 후, 청와대 영부인께 작전 성공 의 타전이 밤공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렇게 한고비를 넘긴 그 이튿날….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마담은 ‘성안’에 있 는 ‘소 종축장’을 시찰하게 됐는데, 별 이 상한 퍼스트레이디가 다 있다. 겁도 없이 소곁에 다가가 뿔도 만져 보고, 아가리를 두 손으로 벌려 이빨도 살펴보고, 뒷발을 들어 발굽도 더듬어 보는 거 있지? 양국 경호원들의 등짝에 식은땀이 배이며 신 경세포가 발작들을 해댔다. 만에 하나 소 뒷 발에 채이거나 소 아가리에 물리시기라도 한 다면 어쩔 건가, 그래? 급히 손씻을 물과 소독약, 비누, 타월을 대령 하고 마담의 뒤를 따랐는데 보고를 들은 여사 께서 그날 저녁 만찬장에 나온 마담에게 웃으 며 물었다. “그러다 물리거나 뿔에 받히시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그랬어요?” 마담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여사를 쳐다봤다. “소는 절대 사람을 물거나 떠받지 않아요. 저도 어렸을 때 소를 키워 봐서 잘 알죠” 그러면서 상식적인 원리도 모르는 한국의 영 부인이 되레 우습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의 영부인은 마담 디오리의 티없이 맑은 웃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엊그제… 미용사가 실수를 했다죠? 죄송합 니다” 아직도 약간 말려 올라간 머리칼을 흔들며 마담이 놀란 눈을 치켜떴다. “아니예요, 내가 미리 얘길 해 줬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으니 제 잘못이죠” 그날, 우리의 영부인은 니제르 영부인한테 흠뻑 빠져들었는데 이튿날 또 일이 터졌다. 관례상 마담에게 보석함 선물을 들여 보냈는 데, 이 아줌씨가 그걸 한사코 거절하는 거 있 지…? 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인가? 그렇더 라도 그렇다. 국가 간에 주고받는 선물을 마 음에 든다 안 든다로 거절하는 건 결례고 실 례의 원천이다. 주면 주는 대로 사의를 표하고 받아 챙기는 게 상호간의 예의다. 선물 전달 책임자가 눈 치를 살피며 여쭸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걸로 바꿔 올까 요?” 그런데 마담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모범 답안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나라는 가난하답니다. 이번 방한 때 우리 대통령께서 전세기도 못 내고 일반 여객 기로 오셨잖아요. 내가 이런 걸 들고 가면 우 리 국민들이 욕할 거예요. 혹시 은으로 만든 자그마한 장식품 같은 게 있다면 하나쯤 기념 으로 갖겠어요” 주변에 있던 한국 관리들의 코끝이 시려 오 는 거 있지? 마담의 요청에 의해 화려한 보석함들을 치우 고 다음 순서에 입각, 이번엔 형형색색의 꽃 들을 들여 왔는데 방 안을 가득 메운 꽃향기 에 취해선가, 니제르의 퍼스트레이디는 간만 에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코끝을 킁킁대며 이꽃 저꽃…, 정력의 상징 ‘셀비어’, 질투의 화신 ‘시 클라멘’에서부터 연정의 ‘라일락’, 기다림 의 ‘아이리스’를 거쳐 약속의 ‘안개꽃’, 밀회의 ‘튤립’, 사랑의 ‘장미’까지 고루 남김없이 섭렵하신 후 과연 어느 꽃을 고를 건가의 결단을 지을 차례가 왔는데… 이 영부 인의 튀는 방향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 다. 이꽃 저꽃 실컷 냄새만 빨아 놓고선 정작 냄 새도 없는 조화를 집어드는 거 있지? 의전 담 당관이 의아해하며 마담을 쳐다봤다. “그건 냄새도 없는 비닐 조화입니다. 마 담” “알고 있어요. 우리 나라는 땅이 메말라 정 원을 가꿀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런 조화라 면 모래땅에 심어 즐길 수 있잖아요?” “……!” 유구무언, 무슨 얘기를 어떻게해야 같은 선 상에 설 건가…? 역시 그날 저녁, 청와대 영 부인께 보석과 꽃 이야기가 상세히 보고되어 졌는데…. “그래서 보석함은 그렇다 치고 꽃마저 물리 쳤단 얘기예요?” “그것도 사치라며…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여사님은 곁에 앉았던 각하를 물끄러미 쳐다 봤다. “허헛, 좀 별난 부인이구만. 보석도 싫다, 꽃바구니도 사양한다…” 영부인이 각하 들으랍시고 비서관에게 지시 했다. “가서 꼭 전해요. 이건 내가 선물하고 싶다 고 전하고 그 조화가 마음에 드시면 비싼 게 아니니 정원을 꾸밀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받 아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비서관이 돌아간 후 영부인께서 각하에게 간 청했다. “어떻게 좀 도와 줄 수 없을까요?” “줘도 안 받겠다는 사람한테 뭘 도와 준단 얘기야?” “그게 아니라 우리 나라가 니제르를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 아녜요? 산업 기 술이라든가 영농법이라든가…” 대통령이 영부인을 쳐다보며 너털웃음을 터 뜨렸다. “임자, 그 마담한테 푹 빠졌구만, 헛헛 헛…” “나이도 젊은 분이 생각이 참 깊어요”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다행히 여사님의 간청(?)이 받아들여져 한 트럭분의 조화가 귀국하는 마담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조화들은 니제르 공화국 대통령 관 저 어느 한켠에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져 한 국 대통령 영부인의 아름다운 인정을 전달해 주고 있었는데…. 그렇게 아프리카 후진국의 어느 공화국 영부 인의 모습은 육여사의 가슴에 남아 오늘날 한 국의 사치성과 고관 부인들에게 고단백 실행 지침으로 브리핑되고 있었음이라. 영부인의 얘기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실내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마담 디오리를 본받자는 무언의 일체감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산신령과 쥐신 잡는 해병 아내를 보낸 지 어즈버 두 해…. 며칠 전 여름 휴가를 맞아 근혜, 근영, 지만 을 데리고 대통령 휴양지가 있는 진해 앞바다 엘 다녀왔다. 그곳엔 아내와의 추억이 어느 곳보다 진하게 배어 있는 저도(楮島)란 이름 의 섬이 바다 한가운데 대가린지 몸통인지를 띄워 올리고 있다. 어느 해던가…. 가족 동반으로 여름 휴가차 진해에 들른 각 하께서 저만치 보일 듯 말 듯 갈매기 춤추는 구름 사이로 찾아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숨은 듯 버려져 있는 쬐그만 섬의 하얀 백사 장과 거울같이 맑은 물을 용케도 발견하셨다. 바로 그 섬이 오늘날 남해의 보석 같은, 서 민 불가침의 대통령 전용 휴양지로 선정된 저 도란 국가 원수 여름 별장인데, 각하는 그날 이후 진해 별장에 왔다 하면 이유 불문, 그곳 으로 뱃길을 달려 낚시도 하고 가족과 함께 수영도 즐기다가 해가 지면 아쉬운 듯 다시 진해로 U턴하곤 했었다. 그런데 영부인께 문제가 생겼다. 대통령 식 구들이 진해에서 저도로, 다시 저도에서 진해 로, 오락가락 해댈 때마다 그림자처럼 해군 함정이 줄레줄레 따라붙는 거 있지? 대통령 식구래야 기껏 다섯 명인데 그들을 위해 해군 함정이 뜨고 수많은 장병들이 경계 임무에 들어간다는 게 도대체 납득이 안 가고 껄끄럽기만 하던 영부인께서 대통령께 한 말 씀 올린다. “우리야 놀러 온 사람들이니 편하게 쉬다 가면 되지만 저기 병사들은 이 더운 데 무슨 고생이죠? 그러지 말라고 하세요. 여기 있는 경호원들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그때 대통령이 웃으며 대꾸했다. “임자가 한번 얘기해 봐. 저 친구들, 내 얘 긴 통 먹혀 들지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통령도 좀 그랬다. 누구든 먹고 마시며 물장구 치고 여름 휴가 즐기는데 그 옆에서 새벽잠 설치고 구령에 맞 춰 악을 쓰며 눈알 벌겋게 밤새워 근무하는 건 아무래도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 했다.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대통령이 진해에만 머 물던가, 아님 저도에만 눌러 앉아 여름 휴가 를 다 때운 후 곧장 서울로 직행해 버리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 아닌가….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으면 해군 함정이 움직 일 리 없고 영부인이 부담 갖는 해군 함정 장 병들이 편해진다는 유권 해석이 나온다만, 각 하께선 전혀 그럴 의도가 없으신 게, 진해 별 장에만 처박혀 여름휴가를 몽땅 까먹고 가자 니 저도의 맑고 깨끗한 백사장이 눈에 선하 고, 그렇다고 저도에만 머물자니 저도엔 불행 하게도 대통령 발뻗고 쉴 만한 시설이 전혀 없었음이라….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대통령의 시야 반경 에 낡은 목조건물 한 채가 들어왔다. 일제 식민통치시대에 각하처럼 눈밝은 어느 일본 친구가 이곳에 들러 만들어 놓은 여름 휴양 별장이었는데 각하는 그 낡은 목조건물 을 이용하기로 작심, 경호실장에게 지시했다. “저 집 말야. 대충 수리해서 우리 가족이 여기 오면 숙식할 수 있도록 해 봐. 그럼 우 리가 안 움직여도 되고 해군 함정이 이동하느 라 부산을 안 떨어도 될 거 아냐” 그런데 경호실장이 좀 과잉을 해 버렸다. 그렇게 지시를 한 그 이듬해, 다시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맞아 청와대 가족을 이끌고 진해 별장으로 핸들을 꺾었는데 각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옆에 앉은 지만에게 도로변 마을들을 일일이 소개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 다. “저기 모퉁이 마을 보이지? 저 마을은 작년 에 젖소를 키워 마을 소득이 평균 3천만원씩 돌아간 마을이야. 예전엔 농사만 지어 어떨 땐 끼니도 거르던 곳이지” “경부 고속도로 총 길이가 얼만지 알아? 폭 22.4km, 전장 4백28km, 터널은 모두 12 개…” “저기 저 마을 뒷산을 자세히 봐, 전부 밤 나무지? 원래 쓸모 없는 잡목들만 있던 걸 전 부 밤나무로 바꿔 심었더니 저렇게 풍성하게 자랐어” “아빠가 어릴 때 배가 고파 먹을 게 없나 하고 산등성이를 헤맸던 적이 있었거든? 그때 지금처럼 저렇게 산에 밤이나 감나무 같은 게 있었더라면 그거라도 따먹고 배를 채웠을 거 아냐? 그래서 산에다 저렇게 유실수를 심게 했지” 대통령 아버지께선 소시적 엄청 배를 곯았 다. 얼마나 찢어지게 못 살았음, 추석 명절이 내일인지 어젠지도 헷갈리고 있었을까 그래. 구미 보통학교 6학년 어느 날, 웬일이니? 선 생님이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들 가란다. 아 이들의 환호성이 교실을 날려 버릴 듯 진동을 칠 때까지도 박정희 학생은 꿈을 못 깨고 있 었는데, 선생님의 보충설명에서 내일이 추석 명절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일이 추석 명절날이니 모두들 집에 가서 부모님 일들을 도와 드리고 모레 만나자” 집으로 돌아오는 밭이랑 길에서 아이들이 떡 자랑, 옷자랑을 해 대었지만 정희에겐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분위기 로 봐서 떡은 고사하고 밥이나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 가 오르고 마당엔 떡 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정희네 집은 썰렁했다. 어머니는 묵묵 히 해어진 정희의 윗저고리를 꿰매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부엌을 들여다보니 큰형 수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얼굴을 쓰다 듬으며 무언가 손에 꼬옥 쥐어 준다. 담장 옆 에 서 있던 이 집의 유일한 소득원인 감나무 에서 열린 홍시였다. 그때 어린 정희는 생각했다. 저 앞산엔 왜 저따위 쓸모 없는 나무들만 심어 뒀을까… 저 기다가 감나무도 심고 밤나무, 사과나무 같은 걸 심어 뒀으면 배고플 때 가서 따먹을 수 있 을 텐데 말이다. 바로 그 배고팠던 기억이 어 쩌면 저 마을 뒷산에 밤나무를 무성하게 심게 했는지도 모르는데…. 아들에게 서빙하는 대통령 아버지는 가끔씩 길가에 차를 세워 휴가 길을 지체시키기도 했 었는데, 추풍령 휴게소 근처에 이르러 대통령 은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로 분위기를 잡 았다. “이 도로를 닦느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 지. 그래서 위령탑을 세운건데 그 중엔 산신 령 때문에 목숨을 버린 사람도 몇 있었어” 산신령 이야기에 지만은 물론, 옆에 있던 근 영, 근혜의 귀까지 쫑긋해졌다. 지만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산신령이라면 귀신 아녜요? 진짜 신령이 있어요?” 지리한 여행길에 귀신이야기는 사람들의 호 기심을 자극시켰다. 차 안의 식구들이 하나같 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통령을 향하여 시선 을 모았고 밀려드는 궁금증에 근영이 다급하 게 재촉했다. “아버지, 그럼 귀신이 진짜 나타났단 말예 요?” “귀신이 아니라 산신령이었대, 산신령…. 아 마, 이곳 어디 산허리 부근 공사 때였을 거 야” 각하의 논픽션을 작가가 대신 옮기겠다. 김천시 교동 부근의 험준한 산허리를 깎아내 리는 공사는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다. 그날도 불도저 운전사 ‘김기사’는 마스크 를 두르고 산허리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울 창했던 숲은 둔탁한 기계음에 깔려 힘없이 무 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만치 B조에 속한 ‘박 털보’가 불도저 운전석에서 매서운 한파를 독한 소주로 달래며 아름드리 향나무 한 그루 를 쓰러뜨리고는 ‘김기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바로 그때, 또 한 그루의 고목에 불도저 삽 을 들이대고 마악 찍어 내리려는 순간, 허연 수염을 길게 드리운 할배 한 분이 불현듯 나 타나 ‘김기사’의 불도저를 가로막는 거 있 지? 자신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작동시킨 김 기사가 험상궂게 노인을 노려보며 고함쳤다. “노인장, 그렇게 갑자기 앞을 막아서면 어 떡합니까? 여긴 통제구역이란 걸 몰라요?” 그러나 노인은 긴 수염을 겨울바람에 휘날리 며 말없이 김기사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서 나가요. 여기 있다간 다칩니다” 청각 장애인인가…? 노인은 침묵 속의 부동자세로 일관,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참다 못한 김기사가 차 에서 내려 노인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요? 경비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사람들을 마구 들여 보내 고…” 그런데 순간, 노인 가까이 다가가던 김기사 의 온몸에 갑자기 전율이 흘렀다. 우뚝 서서 말이 없는 노인의 하체가 희미한 안개처럼 보이지 않는 거 있지? 붉게 홍조 띤 노인의 얼굴은 무언가에 노한 듯 차디찬 눈길과 어우러져 묘한 앙상블을 이 루며 김기사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뿜어 대 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방 천지가 울리는 듯한 육중한 목소리로 말문을 틔웠다. “이곳은 수천년 동안 살아온 내 집터일세. 거처를 옮길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 줄 수 없 겠나?” 노인의 말소리에 주변 나무들이 진동하고 있 다는 걸 김기사는 느꼈다. 그리고 그는 넋 나 간 모습으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얘기를 내뱉고 있었다. “여, 여긴 내가 맡은 공구입니다. 책임 할당 이…” 노인의 홍안에 분노가 서렸다. “못된 사람들 같으니…!” 그리고 노인은 삼베 바지 방귀 새듯 홀연히 사라졌다. 멍하니 노인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 보고 있는 김기사에게 박털보가 달려왔다. “이봐, 방금 그 노인 어디로 갔어?” “모… 몰라… 나도…” 그리고 이튿날, 김기사는 이유도 없이 사표 를 내고 귀향길을 재촉해 버렸는데, 며칠 후 동료들에게 한 장의 부고장이 날아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시름시름 앓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의문의 사태는 김기 사가 맡았던 공구에서 잇따라 일어났다. 그 구간을 맡았던 사람은 하나같이 시름시름 앓 거나 반 등신이 되어 일손을 놓는 거 있지…? 종래엔 아무도 그 구간을 맡으려 하지 않아 공사가 중단될 지경이었다. 다급해진 건설 본 부에서 군에 협조 요청을 했고, 어느 용감한 해병 용사 하나가 자원해 왔다. 귀신 잡는 해 병 용사가 호기를 부리며 불도저를 몰아 문제 의 구간을 밀어붙이기 시작했을 때, 역시 그 수염 허연 할배가 또 나타나 같은 얘기를 리 바이벌했다. “여긴 내 집터야. 집을 옮길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 주게” 그러나 해병 용사는 뭔가 보여 주고 싶었다. 귀신 잡는 해병의 위용은 물론, 부대장의 격 려 속에 특별 휴가를 떠나는 자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그는 노인의 형체를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랬는데… 해병 용사가 밀어붙인 흙더미 속 엔 한 아름이 넘는 구렁이 한 마리가 허리가 토막난 채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것이었다. 해병 용사는 온몸의 신경세포가 거꾸로 치솟 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 었다. 뒤에서 공사장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 는 것도 그는 느끼지 못한 채 비실비실대며 현장을 빠져 나와 그대로 귀대 보고도 않고 집으로 냅다 줄행랑을 쳤는데, 며칠 후 그는 불귀의 객이 되어 젊디 젊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아니 아버지, 그럼 산신령이 실제 있다는 얘기네요?” 신기한 얘기에 모두들 멍하니 대통령만 바라 보는데 근혜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다잖 아” 곁에 앉았던 영부인이 웃으며 식구들을 돌아 봤다. 대통령의 고속도로에 얽힌 얘기들은 끝 간 데 없이 계속되었다. 그런 대통령의 얼굴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 자랑스러움의 이유를 영부인은 알 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구상은 1964년 서독 을 방문했을 때부터 시동이 걸린다. 당시, 명색 일국의 정상이 외국을 순방하는 데 대통령 전용기 한 대 없었다. 그만치 못 살고 가난해 터졌었단 얘긴데, 그 렇다고 대통령 체면에 배낭 짊어지고 무전여 행을 떠날 수도 없는 처지라…. 다행히 독일 애들이 사정을 눈치 긁고, 당시 싱가포르까지만 운행하던 루프트한자 여객기 를 서울까지 임시 연장, 동아시아 조그마한 땅덩어리 허리 잘린 국민소득 3백불의 지구촌 최대 빈국 대통령을 모셔가 준 건데, 남의 나 라 비행기… 그것도 일반 여객기에 몸을 실은 각하는 못 사는 나라의 수치심으로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내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하늘만 바라보고 땅만 갈아 먹고는 평생 이 꼴 면치 못해. 산업을 성장시켜 수출을 해 야만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어!” 수출이란 건 이쪽에서 팔아 먹을 게 있어야 성립된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기름진 옥토가 어쩌구 너불대지만 그건 시인이나 문학작품에 나오는 감상적인 얘기지, ‘거시경제’와 맞 닥뜨리면 그거 전부 헛소리란 게 금방 드러난 다. 지하 자원이 있어 캐내 팔아 먹겠나, 브라질 처럼 논밭에 커피 있어 따다 수출하겠나. 말라 비틀어진 들판은 해마다 보릿고개만 창 출하며 굶주림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 빈둥대는 일손들을 활용해 물건 만들고 그걸 내다 팔면 바로 수출인데 물건 만들자니 재료를 들여 와야 하고 그 원자재를 들여 오 자니 달러가 없었다. 그래서 각하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 지금 날아가고 있는 서독에 인력을 수출했다. 탄광의 광부로, 그리고 병원 간호사로…. 이 역만리 타국에 수출된 그들은 고국에 소중한 달러를 보내 주었고 독일인들에겐 부지런하고 예의 바른 한국인을 일깨워 주었다. 각하가 남의 나라 비행기를 얻어 타면서까지 무리하게 서독행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바로 그 고마운 수출 인력들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나마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착 즉시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제 일 먼저 광산을 찾았고 병원에서 헌신하는 조 국의 언니·누나들을 찾았는데, 그들은 자기 들을 찾아 준 조국의 대통령을 목이 메어라 반겼고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하얀 가운을 입 은 채 구름처럼 고국의 대통령을 보고자 환영 식장에 모여들었다. 각하의 목이 메인 연설이 있었다. “사랑하는 조국 동포 여러분…” 그런데 웬일이니? 각하가 뒷말을 잇지 못하 고 고개를 떨구는 거 있지? 환영식장에 모였 던 대한의 오빠·언니들이 일순 쥐죽은 듯 숨 을 죽였다.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 지금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고 계신다…!’ 옆에 섰던 서독 뤼브케 대통령이 잠시 숙연 한 모습을 보이며 우리 각하를 쳐다봤다. 잠 시 후 각하의 목메인 연설이 다시 이어졌는 데…. “고생이 많으시죠, 여러분…” 국내에서 하던 웅변조의 대 국민 담화식 톤 이 아니었다. 마치 대화를 하듯, 한 사람 한 사람 마주앉아 속삭이듯, 그러나 가슴 속 한 을 담은 오열이 숨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그런 연설이었다. “조국이 못 살고 가난한 죄로 사랑하는 가 족들과 이별을 한 채 이렇게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 와서…” 각하는 기어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 다. 저만치 연단에서 연설을 중지한 각하가 흐르 는 눈물을 닦느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순간, 여기저기서 숨죽인 울음들이 환영식장 을 거대하게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그건 한 편의 서정시와 같았다. 어느 드라마틱한 연출가가 있어 이렇게 리얼 한 작품을 뽑아 낼까…. 각하를 수행했던 수 행요원은 물론, 식장에 참석했던 독일사람들 까지 덩달아 울음들을 삼키고 동양의 가난한 나라를 향해 아낌없는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 었는데, 뤼브케 노(老)대통령이 주머니에서 손 수건을 꺼내 각하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아 주 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대통령 각하, 대한민국은 반드시 성공합니 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러나 그날, 그렇게 중간에 잘라진 각하의 연설은 더이상 이어질 수가 없었다. 온통 울 음바다가 됐는데 더이상 대통령 연설이 무슨 소용인가…. 스케줄이 예정했던 시간보다 세 시간이나 늘어졌다. 부둥켜 안고 우는 대통령 도 대통령이지만 보내기 아쉬워하는 언니·오 빠들의 몸부림이 지켜보는 독일애들로 하여금 다음 스케줄을 들이밀 수 없게 만들었음인데, 그러나 어쩌랴… 만남이 있어 이별이 있는 것 을…. “각하, 이대로 가시옵니까. 저희들만 두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대통령 각하, 하루라도 저희들하고 계셔 주십시오!” 귓전에 와 닿는 그들의 애달픈 간청을 뒤로 하고 나오는 대통령은 명치를 차고 올라 파도 같이 역류하는 서러움을 삭이고 삭이며 수십 번이나 다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고생해 다오… 내, 기필 코 자랑스러운 고국을 만들어 그대들에게 바 칠지니 그때 우리 모두 함께 속 시원히 울면 서 지난날의 서러움을 털어 내자구나…’ 각하의 눈물 삼킨 다짐은 세계적인 산업도로 아우토반을 만나면서 경부고속도로의 구상으 로 구체화되는데, 넓게 뚫린 아우토반을 달리 다 갑자기 차를 세워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바닥을 쓰다듬어 보기도 했고 인터체인지와 도로 표지판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피며 영문 을 모르고 따라붙는 독일 친구들에게 ‘길이 가 얼마냐, 총공사비가 얼마나 들어갔느냐? 동원된 인원은 모두 몇 명이나 되었느냐? 도 로공사 중의 문제점은 어떤 것들이 있었냐 …?’ 숨쉴 틈 없이 과외 학생마냥 질문을 퍼부었 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각하는 측근 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아무리 산업이 발달되어도 수송능력이 없 으면 국제시장에서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게 돼. 우리도 산업 도로를 갖추어야 하는데 돈 이 없어, 돈이…” 돈 문제는 아무리 끗발 있는 실세 측근들도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그게 어디 한두푼 들어 가는 사업인가…. 각하는 지금 막 이륙한 비 행기 창 아래에 펼쳐진 아우토반을 아쉬운 듯 내려다보며 씁쓸히 미소졌다. 그리고 어금니 를 지그시 깨물었다. “히틀러란 친구, 후손들에게 멋진 선물을 남겼구먼…” 그리고 3년 후인 1967년 어느 날… 관계 장 관들을 소집한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경부고 속도로 건설공사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임자들, 우리 일 하나 벌여 봐. 고속도로 하나 깔자구!” 엄청난 각하의 프로젝트에 너나없이 상하 아 래위 턱을 분리시킨 채 말문을 잊고 있는 각 료들에게 전대미문의 대통령 브리핑이 있었 다. “군산항을 축으로 고속도로를 닦을까 했는 데 일본 애들이 36년 동안 그곳을 개발하지 않아 모래가 켜켜이 쌓여 있어. 그걸 치우자 니 엄청난 돈이 들어가. 도리 없이 부산을 축 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깔아야겠어” 경제 각료가 먼저 빠듯한 나라 살림을 근거 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각하, 고속도로 건설엔 엄청난 재정이 필 요합니다. 지금 당장 정부 예산만 해도…” “알아요, 알아. 그렇다고 마냥 늦출 수도 없 는 일이야” “각하, 이 일을 벌이려면 외국 은행의 도움 이 필요한데 현재 우리 나라의 해외 신용도로 봐서 그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미국에서도 도와 줄지도 의문이고요” “미국? 우리가 언제 미국 믿고 살았소? 도 와 주기 싫다면 관두라고 해요. 외자 조달이 안 되면 도로 공채와 도로세, 석유에 관련된 소비세 같은 걸로 우선 충당하고 나중에 갚으 면 될 거 아니오?” “각하, 재원 조달은 어떻게 한다손 치더라 도 국내 어떤 건설업체도 아직 고속도로를 닦 아 본 기술은 물론 경험이나 장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외국업체에 맡길 순 없 는 일 아닙니까?” 우여곡절 끝에 ‘국가 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이란 게 발족됐는데, 야당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71년 선거를 앞둔 대국민 선심용 공사다! 즉각 중지하라” “투자 우선 순위가 뭔지도 모르느냐? 이건 대통령 독단으로 결정된 졸속 행정이다!” “고속도로 건설은 소수 귀족들의 자가용 향 락을 위한 도로다!” “독재자 히틀러를 따라하는 박정희 군사 정 권을 타도하자!” “대원군의 경복궁 건립이 국가와 백성을 도 탄에 빠뜨렸다는 걸 명심하라!” 한여름 엉머구리떼처럼 들고 일어나 저마다 트인 입으로 반대에 의한 반대를 짖어대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미국 애들까지 거들고 나서 는 거 있지?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한다면 한국 경제는 파산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두고 보라!” 신문엔 연일 어깨띠를 두르고 반대 시위를 하는 야당 지도자들의 가두 행진을 싣고 있었 다. 그들의 어깨띠엔 심지어 ‘포항제철 건설 을 중지하라!, ‘울산정유공장 결사반대!’란 글귀까지 등장했다.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다. 당시의 신문을 보면 알 만한 인사들의 어깨 띠 두르고 가두 시위하는 모습들이 그대로 박 혀 있다. 박혀 있는데… 사면초가에 갇힌 각 하에게 벌떼 같은 야당의 반대 시위가 보고되 자 그는 씁쓸히 웃었다. “두고 보라고 해. 누가 옳았는지… 내 가 히틀러를 닮아간다구? 그래, 좋아. 히틀러 가 비록 독재자였지만 그가 남긴 아우토반이 전후 독일 경제 부흥의 밑그림이 됐다는 건 왜 모르지?” “하지만 각하, 미국의 반대도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이봐, 자유가 승리하는 길은 오직 경제적 승리뿐이야. 분단국의 통일은 역사가 해결해 주길 기다려야 해. 그렇다고 손 털고 마냥 기 다리고만 있을 거야? 우린 그 동안 경제적 부 강을 이룩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 는 게 할 일이야, 알아? 야당에서 뭐라고 떠 들건 내버려 둬! 나중에 고속도로가 깔리면 그 길 지나가나 안 지나가나 두고 보자구” 그렇게 ‘보리 문둥이’ 특유의 고집으로 밀 어붙인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장장 428km의 국가 산업 대동맥으로 위용을 나타 냈고 시원하게 뚫린 4차선 위로 달리는 고속 버스 안내양이 신종 유망 직업의 스타로 선망 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웃기는 게 있었 다. 그렇게 극심한 몸부림으로 반대를 해댔던 당 시의 야당 인사들이 길 뚫리기가 무섭게 너도 나도 고속도로를 달리며 금쪽 같은 선거 유세 기간을 단축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지만에게 열심히 고속도로에 얽힌 사연을 들 려 주는 대통령을 곁눈질하며 영부인이 미소 를 지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대통령의 신들린 가이드로 이곳저곳 에서 차를 세웠고, 덕분에 대통령 일가가 진 해 별장에 닿았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린 밤 이 되어 있었는데, 대통령은 그제야 생각난 듯 경호실장에게 스케줄을 변경시켰다. “야, 종규! 저도에 있는 그 목조집 수리해 놨재?” 진해보다는 아무래도 저도 쪽으로 아예 자리 를 까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음인데, 각 하는 작년에 지시한 목조 건물 수리 건을 용 케도 기억해내고 저도행을 재촉했던 것이다. 경호실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자신 있 는 어조로 대답했다. “네, 각하. 이곳보다야 다소 불편하시겠지만 머무시는 덴 별 지장 없게 꾸며 놓았습니다” 대통령 일행은 곧장 저도로 뱃길을 잡아 야 간 상륙 작전을 감행하는데, 웬일이니…? 대통령이 혼신의 힘으로 눈에 힘을 주어 사 방을 둘러봤지만 그 목조집은 보이질 않았다. 대신, 예전에 없던 아담한 2층 돌담집 하나가 목조집을 대신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각 하의 양미간이 여덟 팔 자로 깊게 패이는 걸 옆에 섰던 비서실장이 발견하고 세포 근육을 긴장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까 각하의 노성이 늦은 밤 저도의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종규 어디 갔어? 경호실장 찾아와!” 느닷없는 각하의 진노에 당황한 수행원들이 경호실장을 찾느라 부산을 피운 얼마 후, 경 호상황을 점검하다 각하의 호출로 숨이 턱에 차게 달려온 경호실장에게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 왜이래? 뭘 시키면 꼭 이 따위로 일을 벌이고 그래? 그냥 수리해 놓으랬지, 누가 이 렇게 새로 지으랬어?” 그제서야 수행원들은 대통령이 진노한 이유 를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문제 는 이미 뒤틀려 버린 각하의 심술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다시 뱃길을 돌려 진해로 되돌아 간다고 우기는 거 있지? “짐 풀지마. 도로 가자! 진해 별장으로 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유구무언이 된 경호 실장을 제치고 비서실장이 각하 앞으로 나섰 다. 역시 젊은 경호실장보다 나이 듬직한 비 서실장이 각하를 달래는 데는 나을 터. “기왕 이렇게 당도하신 거 오늘밤만 주무시 고 가시죠. 밤길이라 파도도 위험하고 진해공 관은 각하께서 이곳에 가신다고 미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밤바다의 파도가 겁나고 진해 별장의 준비 상태가 껄끄러워 마지못해 입을 굳게 다문 채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데, 비상 걸린 수행 원들이 옆방에 모여 대책회의를 긴급 소집했 다. 대통령이 저토록 화를 내고 심술을 부리시는 건 순전히 경호실장 때문이라… “대체 각하의 성격을 아시는 경호실장이 왜 이런 실수를 했어요. 그래” 비서실장께서 가볍게 경호실장을 나무랐다. “저렇게까지 진노하실 줄은 몰랐어요. 에이, 정주영 회장은 괜히 나서서 사람 입장만 난처 하게 만들어 놓고 그래” 경호실장의 얘긴즉, 그래도 명색 대통령이 머무실 집인데 보안상 아무 업자에게나 맡길 수도 없고 해서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에게 가볍게 부탁을 했더란다. “각하께서 진해로 저도로 왔다갔다 하시니 까 수행원들도 있고 해서 불편하신 모양입니 다. 저도에 있는 목조집을 머물 수 있게 고치 라고 하시는데 정 회장께서 한번 손봐 주십시 오” 그랬는데 정 회장은 그 목조집을 아예 흔적 도 없이 치워버린 후 그 자리에 덜렁 아담한 2층 돌담집을 만들어 놓아 버렸단다. 비서실 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분인들 뭐 일부러 그랬겠어요? 대통령이 머무실 집이라니 딴엔 성의를 보인 모양인데 문제는 각하께서 화를 풀지 않으니 그걸 어떻 게 하느냐 이거외다” 수행원 중에 뇌세포 회전이 팔랑개비처럼 돌 아가는 친구가 하나 있어 아이템을 뽑았다. “아니, 정 회장이 지금 어디 있는데 이 밤 중에 불러온단 말야?” 다행히 정 회장이 이곳 저도에 먼저 와 대기 하고 있었단다. 이튿날 아침… 아직도 누르퉁 퉁 잔뜩 부어 있는 각하에게 비서실장이 조심 스레 접근했다. “각하, 편히 주무셨습니까?” 심기가 엉망인 데 편히 주무셨을 리가 있나? “진해로 옮깁시다. 거기서 아침 먹겠어요” 대통령이 먼저 선수를 치고 말문을 막는다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비서실장인가, 많은 사람이 이마 맞대고 어렵게 뽑은 아이템을 대 통령 말 한마디로 사장시킬 순 없는 일. “각하, 정주영 회장이 아래층에 와 계십니 다. 만나 뵙고 싶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요? 그 사람이 여기에 어떻게… 올라 오라고 해요” 각하는 노련한 비서실장의 술수(?)에 말려들 고 말았다. 작전의 1단계는 성공했다. 이제부 턴 정 회장의 세치 혀에 맡길 수밖에 없다. 정 회장을 들여보내 놓고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수행원들이 각하의 이층 방에 신경을 집중시키며 상황 변화에 오감을 동원하고 있 었는데…. 각하 앞에 선 정 회장은 숙달된 유치원 보모 의 자세로 각하를 어린아이 달래듯 보듬었다. “각하! 이 집, 그렇게 호화별장은 아니잖습 니까?. 많은 돈이 든 것도 아닙니다. 청와대 예산 없이 제가 지어 올렸습니다” “정 회장 개인 돈은 돈 아냐?” “각하, 각하께서 머무실 집인데 제 쌈지돈 인들 왜 못씁니까? 이 정주영이의 성의라고 생각하시고 노여움 을 푸십시오. 경호실장도 이렇게 하라고는 말 하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그러나 누가 알면 뭐라겠어? 가까 운 진해에 별장이 있는데 여기다가 또 돈을 들여 별장을 지었대 봐” “말 많은 야당 인사들이야 그렇게 생각할지 도 모르죠. 그러나…” “야당 인사들이 아냐. 내가 생각하는 건 국 민들이 알면 뭐라겠느냐 이거고, 재벌 회장이 대통령 별장 기부했다면 그것도 대가성 특혜 로 비쳐질 거 아니냐구?” 어쨌거나 그 정도로 대통령의 진노가 풀려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각하는 휴가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후 즉각 공사비를 원 가로 계산해서 현대에 갚았다. 그 우여곡절을 겪고 탄생된 저도의 별장은 그 후 대통령 일가의 여름 휴가 단골 별장으 로, 특히 영부인이 애착을 갖고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그래도 멀리서 파도에 떠밀리며 대 통령 식구들을 엄호하는 해군 함정이 영부인 은 마음에 걸렸다. “식사 시간은 언제냐, 그렇게 일찍 먹고 점 심까지 배고프진 않느냐, 밥은 배불리 먹이느 냐, 조를 짜서 해변가에 수영을 시키면 좋겠 다…”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보채듯 얘기하는 영 부인을 보며 대통령은 그냥 웃기만 했었다. 그러나…. 엊그제 들른 저도엔 그때의 아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고요한 백사장의 적막을 깨뜨리 고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 대통령의 귓전을 울 리며 최고 통치자의 고독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밀려왔다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파 도 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그때의 그 응석을, 그 미소를 애써 더듬어 찾으려고 대통령은 외 로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청와대에선 그렇게 틈을 보이지 않던 임자 도 이곳에만 오면 지아비를 보채는 새댁 마냥 나를 채근했었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조개를 줍다가 대통령 을 부르던 그 모습. “저기요… 이리 좀 와 보세요” 그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은 착각 에 대통령은 화들짝 놀라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멀리 수평선에 원을 그리며 떠 있는 구 름 속에서 그녀의 가녀린 미소 띤 얼굴이 자 신을 쳐다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곳 저도 엔 해변가 자갈 하나 발에 밟히는 모래알 한 줌에도 아내의 숨결이 서려 있었다. 밤 하늘 별 하나에도, 밥그릇 수저 하나에도 그녀의 체취가 깃들여 있었다. ‘왜 그리 일찍 갔누, 미련한 사람… 오늘 같은 날, 임자와 같이 모두 있으면 얼마나 좋 아’ 근혜가 얼음에 채운 막걸리를 내 왔다. 접시 에 담긴 멍게 해삼이 제 엄마 흉내를 낸 것 같다. 차가운 막걸리가 가슴을 더욱 시리게 적셔 왔다. 잔을 비우면 언제나 버릇처럼 옆 에 앉아 젓가락을 가지런히 챙겨주던 아내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그 텅 빈 자리를 무의식 적으로 건너다 보며 대통령은 울컥 치미는 그 리움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날 밤, 대통령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한편의 시를 남겼다.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지듯 소리내어 지나간다. 저 멀리 수평선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불현듯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 속에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달려가도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다시 일군(一群)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 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매미 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 건너 섬 쪽으로 날아간다. 비몽(非夢)? 사몽(似夢)? 수백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 없이 스쳐 간다. 흰 치마 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간 그대. 1976년 8월 5일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지만이와 양담배 76년 7월 4일자 조선일보 사설…. <어제로 육여사 묘소 참배객 1천만 명 돌 파…! 1천만 번째 참배객은 경북 문경읍 점촌 읍 6리의 ‘김경자’ 여인으로…’> 여인은 꼭 한 번 여사의 묘소에 참배하고 싶 다는 일념으로 없는 살림에 쪼개고 꼬불쳐 가 까스로 여비를 장만해서 어려운 서울 나들이 를 감행, 숙원의 육 여사 묘소를 참배했단다. 묘소에 향을 사르고 고개를 숙인 다음 치밀 어 오르는 눈물로 손수건을 흥건히 적신 후 국립 묘지를 나와 보니 다른 욕심이 생겼다. 여인이 난생 처음 와 본 서울이었다. 말로만 듣던 남산에라도 올라 한양 왔다간 흔적으로 사진이라도 한 장 박고 갔으면 딱 좋겠는데 점심 한 끼 여유도 없이 달랑 왕복 차비만 들 고 온 처지라 발만 동동 구르다 아쉬움을 뒤 로 하고 끼니도 거른 채 다시 문경으로 ‘빽 투더’ 했단다. 어느 귀밝고 눈밝은 기자 하나가 그 사연을 일필휘지로 기사화시켰는데, 그 기사를 읽은 각하의 눈 언저리가 붉게 채색되고 있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그 여인에 대한 고마 움이 한데 어우러진 눈물이었음이라…. 각하는 어떻게 하든 그 가난하고 고마운 여 인네에게 보답하는 것만이 이승을 하직한 아 내에 대한 예의일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근 혜, 근영, 지만에게 신문 스크랩을 보여주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가족회의의 결론은 그 시골아낙의 소박한 꿈 인 서울 구경을 시켜주자는 쪽으로 났고, 그 래서 그 여인의 고향으로 비서관을 보내 여인 을 모셔왔다. 물론 먹고 자고 입장권 끊는 비용 모두 대통 령 부담으로 비서실 여직원도 한 사람 딸려 그렇게 오르고 싶어하던 남산은 물론, 창경궁, 덕수궁부터 남대문 시장 들러 쇼핑도 하게 했 고 서울 시내를 샅샅이 누비며 기념 사진도찍 게 했다. 바로 오늘, 그녀의 관광 일정이 끝나 는 날이다. 근혜, 근영, 지만이 모의(?)를 해서 저녁엔 청와대에 불러다 시골 아낙 서울 관광의 마지 막 날을 장식해줄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생애 최고의 선물이 되겠 지…. 각하의 두손에 들린 자그마한 액자 속 에서 영부인이 웃고 있었다. ‘임자, 그 시골 아낙에게 임자가 평소 잘 나누어주던 일기장을 선물해야겠지? 죽은 임 자 이름으로 말야. 참, 임자! 지만인 다음달에 육사 지원서 내기로 했어. 많이 컸지…? 임자 가 있었더라면 보내는 길이 덜 애처로울텐 데…’ 각하는 문득 지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임자, 내가 녀석을 몹시 혼내준 거 알아? 담배를 피우잖아. 그것도 양담배를 말야. 그래 서 혼쭐을 냈는데 그러고나니 가슴이 아프더 구만…. 엄마가 죽고나니 저도 마음 붙일 곳 이 없었던 게지, 아마…’ 사건은 여사가 숨진 이듬해, 지만이 고2때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청와대 외딴섬에 동그마니 내팽개쳐진 외로움, 어머니를 대신 해 분주한 큰누나, 국정에 여념이 없으신 대 통령 아버지… 영부인의 서거는 온실에서만 자라온 지만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와 그 를 감달할 수 없는 현실의 나락으로 빠뜨렸 다. 아버지 몰래 친구 집에서 놀다오게 배려해주 시던 하나뿐인 어머니었다. 지긋지긋하게 따 라붙는 경호원들을 가끔씩 따돌려 아들에게 자유를 찾아 주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는 이젠 하늘 아래 어느 곳에도 없 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 다. 납덩어리처럼 무겁게 다가온 상황 변화는 지만에게 담배를 가르쳤다. 남몰래 구석진 곳 에서 한줄기 뿜어내는 연기에 그나마 처참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놈의 담배 조달이 문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쩍 강화된 경호원들 이 눈만 뜨면 따라 붙는 통에 담뱃가게 간다 는 건 엄두도 못낼 일이고, 그렇다고 청와대 에 요즘처럼 자판기가 있나… 불현듯 아버지 집무실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쌓여있 던 양담배 무더기가 떠올랐다. 가끔 외국인들이 청와대를 찾아오면 외국 담 배를 들고 와 각하에게 선물하곤 했는데 각하 는 국산 담배만 피웠지 양담배는 피우지 않았 다. 각료 중 누군가가 양담배를 피우는 게 발 견되면 그 각료는 그날 눈물이 흐르도록 ‘쫑 코’를 먹고 피우던 담배를 끊든가, 국산으로 바꾸든가, 일도양단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각하의 집무실엔 선물로 들어온 양담 배가 쌓여만 갔는데 그걸 지만이가 눈독 들인 것이다. 어쩔건가. 기왕에 배웠고, 배웠으니 피워야겠 고, 피우자니 담배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아 버지의 소장품에 손을 대는 불경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게 덜컥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담배를 방치해서 청소년에게 유혹을 느끼게 한 잘못이 아버지 각하에게 있었다면 뒷관리 를 소홀히 해 따구리 난 건 순전히 지만의 실 책이었다. 여사가 돌아가신 후 가끔씩 지만의 방청소를 감행하던 각하는 그 날도 어지럽혀진 지만의 방 정리를 위해 들어왔다가 책상 위에 꼬불쳐 둔 장초와 피우다 만 담뱃갑을 용케도 발견한 것이다. ‘이놈 봐라…? 담배를 피워? 그것도 양담 배를…!’ 각하의 노여움은 담배 그 자체에 있는 게 아 니었다. 때가 되면 피울 수도 있다. 더구나 지금의 상황으로 아비된 입장에서 충 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러나 왜 하필 양 담배냐 이건데, 그날 지만은 태어나서 그토록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다. 그렇게 죽은 아내와 지만의 생각에 젖어 오 전 한때의 여름을 까먹고 있던 각하의 귓전에 인터폰의 다급한 목소리가 심상찮은 소식을 전해왔다. “각하! 비상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비상사태? 무슨 일이야?” “지금 국방장관께서 들어와 독대를 원하고 계십니다” “알았어. 들어오시라구 해” 비상 사태라니…? 중국 천안문 사태가 발생해 등소평이 실각하 는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있었지만 그건 이미 넉 달 전 얘기고, 6월 들어 신민당 김영삼 총 재가 사퇴 선언을 하고 이충환인가 뭔가 하는 친구로 총재권한대행을 맡겼다고 시끄러웠는 데 그게 다시 말썽을 일으켜 정국에 회오리를 일으킨 건가…? 8월 초 몬트리올에서 날아온, ‘양정모 선수 의 올림픽 사상 최초 금메달 획득’ 소식에 온 나라가 잔치 기분으로 들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초를 치고 느닷없이 비상 사태라니…? 문을 열고 들어서는 국방장관의 눈에 긴장감 이 감돌고 있었다. “비상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각하!” 장관의 떨리는 목소리로 봐 진짜 심각한 비 상 사태가 발생한 모양이다. “어느 쪽이요? 내부요, 외부요?” “조금 전인 10시 45분경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 안에서 미군 장교 두 명이 피살당했습니 다” 각하는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튕겨 오르고 있 었다. “자세히 설명해 봐요!” “각하, 침착하십시오. 공동 경비 구역 안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어 평소 북측 초소가 우리측 시야로부터 가려져 있었습니 다” “……!” 판문점 양측 공동 경비 구역안에 있는 나무 인데 이게 여름물을 먹어 잎이 무성해지더니 북측 초소를 가려 저쪽 동태 파악에 지장을 초래했다. 초소에 미사일을 설치하는지 김일성이가 왔 다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게된 아군측에서 유 엔군 11명, 한국 노무자 5명으로 조를 편성해 그놈의 미루나무를 가지치기해 버리려고 판문 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근처에 서있는 미루나무에 올라 가지 치기 작업에 들어갔다. 근처에 얼쩡대던 인민군 중위가 스무남 명 되는 졸개들을 데리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멀건히 쳐 다보다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 왔다. ‘왜 너희들 맘대로 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를 하느냐…’ 이건데 미군 장교가 서툰 한국어로 알 아듣기 쉽고 이해가 빠르도록 설명을 해 줬다. “이건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작업이 고 우리 유엔군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니 간섭하지 말아 줬음 좋겠다…” 그런데 이 인민군 장교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 지 어쨌는지 무조건 미군 장교의 귀싸대기를 후려 갈기고 나왔다. 이유도 없고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맞고 가만 있을 놈 누가 있나. 이역만리 타국 땅에 귀싸대기나 얻어 맞으려고 와 있는 게 아니잖은가. 미군 장교가 인민군 장교에게 따지고 대들었다. “말로하지, 왜 때리고 지랄하…”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 이미 인민군 장교의 주먹 이 미군 장교의 양미간에 날아와 박혔고 그걸 신 호로 옆에 섰던 졸개들이 가지치기에 동원된 유엔 군 병사들을 무작위로 개 패듯 조져 대는 것과 동 시, 건너편 북측 초소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온 트럭에서 60여 명의 인민군이 뛰어내려 불문곡 직 각목, 쇠파이프, 삽, 곡괭이의 다양한 품목을 휘 두르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 를 집단 자행한 다음, 이쪽에서 들고 간 가지치기 작업용 도끼를 빼앗아 미군 들을 찍어 버린 후, 그 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은 트럭 세 대까 지 박살 낸 다음, 유유히 북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는 요지의 비상 사태 보고였다. 듣고 있던 각하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이 건 명백한 도발이요, 선전 포고다. 각하에게 있어 김일성의 이같은 행위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각하에겐 평소 져서는 안 될, 반 드시 이겨야만 할 라이벌이 두 사람 있었다. 하나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혁명 초기, 우리보다 좀 잘산다고 대한민국을 옆집 똥개 취급하듯 괄시 하고 멸시하던 친구…. 그리고 또 하나, 북쪽의 혹이 큰 노인, 김일성 주 석…. 먼저 마르코스란 친구부터 짚고 넘어가자. 춘궁기 보릿고개를 못 넘겨 누르퉁퉁 부어 있던 0년대, 봄 되면 깡보리밥 한 사발에 너댓식구 목 줄을 걸어 놓고 눈치밥을 다투던 양아치 피조물만 같았던 우리의 가난했던 시절, 밥술 깨나 뜬답시고 목에 철근 콘크리트를 세우고 우방국들을 눈아래 깔아 내려다보던 아시아의 몇몇 좀 사는 나라들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 필리핀… 이른바 아시아 의 4용(龍)들, 특히 필리핀의 콧대는 태평양을 횡 단하여 UN 의장까지 뻗어 있었다. 마르코스에 있어 한국이란 나라는 그저 죽지 못 해 살아가는 국제 양아치일 뿐이었다. 국민 소득이 래야 필리핀에 대면 저만치 아래서 박박 기어다니 니 게임이 안 되죠, ‘로물로’란 UN 의장까지 배 출시킨 외교력이니 국제 사회 파워를 봐도 그렇죠, 김일성이 쳐 내려왔을 땐 자유 우방국으로서 군대 까지 보내 줬던 나라 아닌가… 뭐 하나 꿀릴 게 있어야 나라 취급을 해 주고 대통령 대접해 줄 거 아닌가. 그래서 중국 대륙에 수제비 덩어리 마냥 달랑 붙 어 있는 자그마한 분단 국가 쯤으로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괄시하길 밥먹듯 하곤 했는데, 1966년, 각하는 다소 꼽지만 그놈들하고 인사도 나누고 친 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남아 순방 계획을 세운 후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 필리핀 4개국에 ‘한번 찾아뵙겠으니 만나 술이나 한잔하자… 그래서 우의도 다지고, 서 로 모르는 게 있음 물어도 보고, 같은 아시아 국가 로서 친하게 지내자’는 요지의 외교 서한 비둘기 를 정중히 날렸고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3개국에 선 흔쾌히 OK 사인이 떨어졌는데, 필리핀에서 보 이콧을 놓는 거 있지? 마르코스 대통령께서 몹시 바쁘셔서 한국의 ‘박 통’을 만나 주실 시간이 없단다… 청와대 각하께 서 뚜껑 열릴 거 아냐? 못사는 것도 서럽거늘 이 무슨 개망신인가, 그래. 명색 일국의 대통령이 방문하겠다 하면 밉건 곱 건 정중하게 맞이하는 게 나라 간의 관례요, 국제 사회의 예의고 에티켓의 기본인데 이게 사람을 무 시해도 유분수지…. 이런 경우는 대통령 개인을 떠나 2천5백만 국민 을 포함한 대한민국이란 국가 자체를 무시하는 행 위로 간주해야 한다. ‘괘씸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 아닌가…?” 각하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붉게 물들면 그건 열 받으셨단 시그널이다. “건방진 놈,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이 6·25 때 군대 좀 보내 주고 우리보다 국민 소득 좀 높다고 콧대 세우는 모양인데, 내가 10년 내 이 나라를 너 희 놈들보다 몇 배나 앞지르게 하고 말 테니, 두고 보자, 이놈! 마르코스 나쁜 놈!” 글쎄 뭐… 실제로 점잖은 입으로 ‘나쁜 놈, 죽일 놈’ 욕을 치셨는진 확인된 바 없지만, 각하께선 불행하게도 두고 볼 시간 여유도 없이 또 한 번 마르코스 그 ‘나쁜 놈, 죽일 놈’한테 연타를 얻 어 맞으시게 된다. 방문을 거절당한 각하의 이빨 가는 소리가 인왕 산 자락을 휘감아 아시아 태평양 연안 국가를 진 동시키던 그해 11월, 운명의 장난은 실로 기묘해서 각하에게 배팅 찬스가 왔다. 때마침 ‘월남 참전 7개국 정상 회담’이란 국제 행사가 추진되고 있었는데, 월남 참전이라면 한국 도 어깨를 들이밀고 열중에 끼일 자격이 충분히 있다. 파견한 군대 인원만도 한국은 4만5천 명에 이른 다. 태국이란 나라는 겨우 17명을 보냈고 필리핀은 천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느 참전 국가 군대가 우리의 청룡, 맹호 만치 용감무쌍하게 베트콩들을 두들겨 잡아 자유 우방국의 위용을 보여 줬던가, 열중에 끼이는 것은 물론 어께에 근육 잡고 목에 아스콘 깁스를 해도 충분할 판이라. 간만에 ‘꺼리’를 발견하신 각하께선 이 국제 행사를 기필코 그것도 당당하게 서울에 유치하고 싶었다. 일곱 개 나라 정상들을 한국에 불러들여 한번 뽄 때 있게 초청국 주인으로서 그 동안 신세 진 것도 갚고 국력도 과시하며 아울러 대한민국이란 나라 를 국제 사회에 번듯이 내세울 기회를 포착하신 건데…. 그래서 필사의 외교력과 혼신의 힘으로 유치작전 을 펼쳐 거의 OK 단계까지 무사히 돌입하려는 찰 나, 마르코스가 초를 치고 필리핀의 마닐라로 U턴 시켜 버렸다. 다된 밥에 재 뿌리고 밥솥째 훔쳐가 버린 꼴이다. 그러나 어쩔건가… 그렇다고 속 좁게 정상 회담 에 안 간다 할 수도 없는 일. 국제적으로 망신창이가 된 건 고사하고 각하 개 인에게도 자존심 문제가 걸려 내장에 쌓인 울분을 잔뜩 담아 마닐라 정상회담에 참석하셨는데…. 그리고 며칠 후…. 금호강을 끼고 대구에서 80리 떨어진 경북 영천 경찰서 서장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 다. “나 서울 경무대 이강석이요. 지금 영천에 와 있는데 서장 있어요?” 마침 서장은 대구에서 높은 손님들이 내려오 셔서 마중 나가고 없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 이 약간 헤맸던 모양이다. “경무대 이… 강석… 이시라면…?” “대통령 영식 이강석이란 말요! 지금 전화 받는 사람 누구야?” 이강석 쯤 되면 좀 세게 나가는 게 좋을 거 란 통밥이 섬광처럼 지나갔는데 그게 적중했 다. “네 넷! 각하… 저 영천 경찰서 경무계장 도○○입니다!” 봐라, 댓빡 추위 타고 황감한 나머지 엉겁결 에 ‘각하’를 남발해대고 있잖은가? “서장은 어딜 갔소?” 너무 오래 추위 태우면 또 얼어 버리는 수가 있다. 때론 부드럽게 풀어 줄 줄도 알아야 높 은 사람이다. “네, 넷… 소, 손님이 오셔서 잠시… 즉시 수배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계 십니 까?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요란하게 설칠 거 없어요. 민심 동향이나 알아보러 내려왔으니까…” 경무계장께서 타이어에 불이 일도록 달려가 ‘귀하신 어른’을 득달같이 모셔 경찰서로 돌 아온 그 시각…! 영문 모르는 호출로 바삐 서장실로 들어온 경찰서장님 방엔 공교롭게도 사건 현장 검증 차 대구에서 울진으로 내려가던 판·검사 두 분 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일이 묘하게 꼬 였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사기꾼과 판·검사의 합석인가, 그래… 짧고 굵게 한탕 하려 는 만년 백수의 웅대한 프로젝트가 여기에서 브레이크 걸릴 운명인가? 그러나 그 상황을 알 리 없는 경무계장께선 우리의 백수 ‘영감님’을 정중히 모시고 서 장 실로 들어와 먼저 판·검사부터 ‘강성 병’… 아니, ‘이강석’에게 소개해 올렸다. “대구에서 울진 사건 현장에 가시던 판·검 사님들이십니다” 순간, 백수의 눈앞에 노오란 잿빛으로 착색 되며 현기증이 이는 거 있지? 빌어먹을…! 판· 검사라니. 무슨 놈의 일이 초장부터 이따위 로 꼬이나 그래… 수순대로라면 인사를 먼저 받 았으니 이젠 판·검사님들께 대통령의 아들 이 소개될 순서였는데 우리의 백수에게 신의 가 호가 함께하고 있었음인가, 강성병은 순간적 인 기지를 발휘했다. 이유 불문, 이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백수가 도계장을 재촉, “됐어요, 나갑시다” 그리곤 판·검사의 인사를 무시하고 황급히 서장실 문을 빠져 나왔는데, 영문을 모르는 박 검사께선 백수가 빠져 나간 문을 바라보며 서장에게 물었다. “저 청년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굽니 까?” 다행히 서장께서도 아직 경무계장으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 글쎄 올시다. 서울서 내려온 높은 분 자제인 모양인데 저도 아직…” 뭔가 찜찜한 감이 박 검사의 뇌리를 휘감고 스쳐갔지만 오늘은 갈길이 바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자, 김 판사님 우린 그만 가 보죠, 뭐” 그렇게 숨가쁜 고비의 호구(虎口)를 운수대 통으로 무사히 넘긴 그날 오후, 경주를 향해 서둘 러 국도를 달려가는 영천 경찰서장 관용차 안 우리의 백수 옆엔 경무계장이 초긴장 상태 로 ‘영감님’을 수행하고 있었다. 백수의 안주머니엔 영천 경찰서 공금에서 지 급된 두둑한 봉투 하나가 액수 불명으로 꽂 혀 있었다. 한참 머리 속으로 봉투 속의 액수를 가늠하는 백수의 귀에 조심스런, 그리고 황공 한 듯한 경무계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영감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젠 아예 ‘영감님’으로 호칭을 정했나 보 다. “뭡니까?” “제가 대구 고보를 우등생으로 나왔습니다 만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 갔습니다” ‘그걸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누군 뭐 대학 나온 줄 아나 보지?’ “그러나 국가에 충성한다는 일념 하나로 경 찰에 투신하여 나름껏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그럼 됐네, 뭐. 나는야 직장 없어 빌빌댄 게 얼만지 알아? 퇴직금도 나올 거 아냐?” “그러나 대학 못 나오고 빽줄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시골에서 경무계장밖에 못하고 있 습니다, 영감님” 음 그래, 감 잡았다. 실력은 있는데 알아 주 는 사람 없고 밀어 주는 이 없어 말단에서 푹푹 썩고 있다, 이거 아냐? 가짜 귀하신 몸께서 장난기가 발동했다. 까 짓 어차피 나중에 깨어 보면 한 자락 꿈일진 데 이 순간이나마 기분 살려 주는 것도 뭐 그렇 게 나쁜 일은 아닐 터. “그래,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 경무계장 얼굴에 때 이른 복숭아꽃이 만개했 다. “여, 영감님, 도와주시겠습니까. 평생 분골 쇄신, 은혜를 뼈에 새기겠습니다!” 호랑이 통뼈니? 뼈에다 도장을 새기게? “글쎄, 어디로 가고 싶냐니까요?” 가짜가 약간 퉁명스레 되물었다. “경무대 경찰서로 가 존경하옵는 대통령 각 하를 먼발치나마 모시고 그분을 위해 몸 바치 고 싶은 일념뿐입니다, 영감님” 이승만 노할배 들었으면 감격해서 표창장 날 리겠다, 얘. “알았어요, 아버님께… 아니, 아버님께 말할 것도 없이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에게 일러 두죠” “그,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야…!” 붉게 물든 경무계장 눈자위에 그렁그렁 이슬 이 맺히고 있었다. 너무너무 감격한 경무계장 께 서 당장 뭔가 보답해 드리고 싶은 소박한 욕 망이 지중해 파도같이 용솟음 치면서 문득 ‘영 감님’ 손목을 보아하니 손목시계를 안 차고 계시는 거 있지? “아니, 영감님 시계도 안 차고 오셨습니 까?” 손목시계 없으면 어디 가서 기죽어 고개 숙 이던 시절이었다. 진탕 마시고 술값 없음, 손 목시 계 풀고 큰소리 치던 호시절 얘기다. 딴엔 경주에 도착 즉시 금장시계부터 한 개 선물해 올 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드린 말씀인데 백수 입 장에선 마치 여름날 콩밭에 오줌 갈기다 외간 남 자에게 치부를 보인 여편네 마냥 가슴 뜨끔 한 코멘트 아닌가? 친구 카메라 팔아 가까스로 양복 한 벌에 기 차표 한 장 끊고 내려온 처지를 행여 눈치 긁 는 다면 이거야말로 프로젝트에 엄청난 차질을 가져올 수도 있을 터. “이 새끼, 차 세워! 나 걸어가겠어”